비움

조금 가벼워지고 조금 더 단단해지기

by 여름둘겨울둘

방학이다.
언제부턴가 방학이란 단어는 아이들보다 내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일의 루틴이 잠시 멈추는 틈에 나는 집 안 깊숙이 쌓인 것들을 들춰낸다. 옷장 안, 서랍 안, 싱크대 안.
손 닿지 않는 구석에서 말없이 버티고 있던 것들.
이사할 때마다 '이번엔 다 비우자' 다짐했건만, 끝끝내 남은 것들이 있다. 아니, 내가 끝끝내 놓지 못한 것들이다.

한 번도 쓰지 않은 플라스틱 반찬통,
집에서라도 입어야지 하고 구겨 넣은, 하지만 결국 외출복으로도 실내복으로도 채택되지 못한 옷가지들,
어디서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는 사은품 부채, 물통, 낡은 이불.
버리고 또 버린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다. 하지만 옷장을 열었을 때, 서랍을 열었을 때, 싱크대 문을 열었을 때—
어딘지 모르게 가벼워진 숨소리 같은 여백이 있다.
마치 체중을 줄인 모델이 들이내 쉬는 한껏 여유로운 숨결 같다.
나는 그 여백 앞에서 괜히 어깨를 펴고, 문득 자신감도 생긴다.

그렇게 비워가며, 오래된 보석들을 만난다.
아이들이 네 살, 다섯 살 무렵 만들어 온 머그컵.
삐뚤빼뚤 선이 가득한 접시.
종이 냄새가 다 날아간 어버이날 카네이션.
그 컵에 커피를 따라 마실 때면, 그날 아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가 떠오른다.
입을 삐죽 내밀고, 눈은 초롱초롱.
'선생님이 도와줬나?' 싶은 마음과 '아니다, 이건 아이 손으로 했을 것이다'란 마음이 교차하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온다.

몇 번의 이사를 거듭하면서도 이 물건들만큼은 놓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소중한 물건을 세 가지만 챙기라’고 말한다면, 아마 나는
통장도, 도장도, 계약서도 제쳐두고
이 머그컵과, 그 접시, 종이꽃을 고를 것이다.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음에도 묵은 물건들이 쌓인다.
그건 감정이고, 기억이고, 상처다.
버릴 때가 되면 안다.
가슴속에 불쑥불쑥 떠오르는 불쾌한 장면들, 혼잣말처럼 나오는 후회의 말들.
누구도 보지 않지만, 그 무게는 나만은 안다.

그래서 꺼내어 닦고, 쓰다듬고, 보내야 한다.
말로 하든, 눈물로 하든, 글로 쓰든.

비운 자리엔 여백이 생긴다.
그 여백은 잠시 그대로 두어도 좋고,
혹은 실수에서 배운 다짐들로 천천히 채워도 좋다.

아침 일찍 일어나, 주방을 정리하고, 아이가 만든 머그에 커피를 따른다.
그 안엔 어제의 나를 정리하는 커피가 있다.
아이에게 내뱉었던 후회의 말, 서툴렀던 마음을 씻는 커피.

나는 다시, 나를 조금 정돈한다.
조금은 가벼워지고, 조금은 단단해져서.
앞으로를 향해,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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