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한 페이지라도 덜어내며 살아가는 삶
유튜브에서 이영자님의 채널을 클릭했는데, 개그맨 이수지님과 함께 보리수를 따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해가 조금 기울어 황금빛이 열매 위에 얇게 발리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잎사귀 뒷면의 연한 초록이 살짝 드러났다 감추기를 반복했다. 그 틈에서 붉게 익은 보리수가 몇 알. 마치 오래된 여름의 기억처럼 손바닥 위에 가만히 떨어지고 있었다.
몇 년 전 배우 정유미님과 최우식님이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 <여름방학>이 떠오른다. 강원도 고성. 내 고향인 속초와 양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바다 냄새가 담긴 공기가 화면 너머로 흘러들어와, 한낮의 뜨거운 빛과 저녁의 길어진 그림자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두 프로그램 다 여름의 한가함을 담았지만, 그 한가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장을 보고, 밥을 짓고, 집을 손보는 일이 먼저였다. 부드러운 햇살과 바람 뒤에는 식탁 위를 채우는 제철 채소와 소박한 반찬, 마당을 쓸고 난 뒤 맡는 흙냄새, 하루를 마무리하며 깨끗이 씻긴 주방이 있었다. 그런 분주함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여유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 모습이 문득, 어릴 적 방학숙제와 겹쳐 보였다. 겉으로는 놀고 쉬는 듯해도, 그 시간을 빛나게 하려면 하나씩 해내야 하는 작은 과제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방학숙제. 80~90년대 여름방학이면, 책가방보다 무거운 ‘해야 할 것들’이 줄줄이 딸려왔다. 교과별로 문제집 사다가 복습도 하고 독후감도 써야 했고 매일 매일 써야 하는데 밀려서 3일 만에 한 달치를 다 써버린 일기. 햇볕에 바짝 말린 잎과 곤충을을 붙인 생물 표본집이라든지, 여행 후 그린 지도와 기행문, 가족 신문, 운동 기록표, 만들기나 그리기 따위가 그랬다. 여름방학은 정말이지 방학이 아니라, 단지 교실의 풍경만 바뀐 또 다른 학기였던 것 같기도 했다.
대학생이 되어 방학숙제가 없어졌지만 길어진 방학만큼,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압박이 따라왔다. 결국 나는 스스로 숙제를 만들었다. 여행을 계획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고, 전공 악기 레슨을 받으며 손끝이 단단해지는 소리를 들었으며 틈틈이 도서관에서 전공책이 아닌 소설도 읽며, 여름의 페이지를 나만의 글씨로 채웠다.
어른이 되고 나니, 잠깐의 쉼에도 숙제가 생긴다. 미뤄둔 집안 정리, 먼지가 쌓인 책장, 예약만 해놓고 가지 않은 병원, 고장 난 물건, 세금 처리, 오래 미룬 안부 전화, 그리고 쓰지 못한 편지. 이런 것들은 방학숙제처럼 제출 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검사해주는 것도 없지만, 머릿속 어딘가에 늘 ‘해야 한다’는 목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릴 땐 숙제를 다 끝내면 개학 전날의 해방감이 있었다. 책가방 속 빈 공책과 연필에서 묻어나던 그 상쾌한 기분. 하지만 어른의 숙제에는 끝이 없다. 하나를 지우면, 여름밤의 모깃소리처럼 또 다른 일이 다가온다. 쉴 때조차, 나를 괴롭히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 속의 빈칸들이다.
이제는 안다. 어른의 방학숙제는 모두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한 페이지라도 덜어내며 사는 일이라는 걸. 그리고 그 페이지 속에는 장을 보고 돌아와 냉장고를 채우는 일, 낡은 커튼을 갈아 다는 일, 그날 해가 지기 전에 먼지를 한 번 더 쓸어내는 일이 담겨 있다. 그건 어쩌면, 평생 이어지는 여름방학 일기인지도 모른다.
과제를 마치고 누웠을 때, 창밖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와 저녁 냄새 속에서,
비로소 잠깐의 여유가 완성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