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서 찾은 세계평화

내가 남에게 관대해질 수 있는 이유

by 여름둘겨울둘

사치도 부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근검절약하느냐 묻는다면 딱히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쓸데없이 가끔,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가 홈쇼핑에서 마스크팩 다섯 개들이 스무 박스는 리모컨 버튼 몇 개를 꾹 꾹 누르는 행위로 주문하고, 배송된 그것들의 유통기한이 훌쩍 넘어가도록 무신경하게 또 잊어버리는 그런 여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쓰레기봉투의 ㅡ이 선 위는 봉투를 묶는 부분입니다.ㅡ라고 써진 글귀까지 꾸역꾸역 쓰레기를 눌러 채우고, 눌러 담을 수 없는 3리터짜리 음식물쓰레기봉투마저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속으로 되뇌며, 그 마지노선을 꼭 넘기고 나서야 속이 후련하고 무언가 절약한 듯한 희열을 느끼는 이상한 여자였다. 고작 몇십, 몇 백 원의 희열이라니. 가끔 그녀도 이해하지 못할 그 버릇의 DNA가 어디서부터,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열고 넣고 닫는 2박 정도의 셋잇단 음표를 만들며, 들고 온 음쓰봉을 놓아버리는 그 찰나의 순간에, 이미 그득한 음쓰봉의 집합소에 누워있는 다른 집 아이들을 보며
'음~ 오늘도 선방했다.'
한다.
치익찌익 슬리퍼를 끌고 가던 발걸음은 이내 가벼워져 착착착착 행진하는 군인들의 군화소리에라도 빙의한 듯한 걸음으로 바뀌고, 혼자만의 자신감으로 충만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만족해 뿌듯한 순간'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세상에 관대 해지는 순간이다.

공동현관 비번을 누르고 들어서니 음식물쓰레기를 양손에 든 아주머니가 ㅡ보여서는 안 될 것ㅡ이라도 든 것처럼 얼른 뒤로 감추고 목례를 하며 빗겨 나갔다.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은 냄새를 맡게 해주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죄송하다 하지 않았고, 그녀는 괜찮습니다 라고 하지 않았지만 스쳐가는 그 몸짓만으로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느껴져서 그녀도 마스크를 써서 보이지 않는 입으로 한 껏 미소 짓고, 동시에 물고기 꼬리지느러미 마냥 눈꼬리를 내렸다 올리며 메시지를 온 얼굴로 전하려 애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닫히는 순간, 강아지를 산책하고 들어오는 12층 아가씨, 고양이를 키우는 10층 아저씨가 엘리베이터 공간 속으로 합류했다. 뒤 이어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옆집 부부가 들어섰다. 모두가 ㅡ오늘의 숙제를 마치러ㅡ 의무감에 무언가 내가 아닌 것에 이끌려 나갔다 들어오는 참이었다. 나갈 때와는 다른 발걸음으로 뿌듯한 군화소리를 내며 개선장군처럼 착착착착 신나게 들어서며 눈인사를 나누고
"아기가 많이 컸네요."
"아이고 강아지 이쁘다. 애교가 장난이 아니네. 우리 집 고양이는 너무 조용해서 재미가 없는데..."
등의 스몰 톡이 오고 갔다.

그리고 이내 정적이 찾아왔다. 순간 강아지 산책시키고 들어오던 아가씨의 손에 들려진 배변봉투의 냄새, 운동하고 들어온 아저씨의 땀냄새, 아기의 유모차 아래에 실려진 뜨끈하고 맵싹한 포장 음식 냄새가 훅 하고 마스크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느꼈고, 모두가 느꼈을 그 냄새들.
몇 초의 정적이, 모두가 냄새를 맡고 있지만 괜찮은 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동시에
죄송하다는 말들이 공기 중에 냄새와 함께 떠다니고 있음을, 그 공기를 따라 옮겨지고 오고 가며 마주치는 눈짓과 시선이
ㅡ괜찮다ㅡ라고 말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차례차례 문이 열리고 그들만의 공간으로 다시 사라져 갔다.

그녀는 그녀의 공간으로 들어와 생각했다.
별 것 아닌데 따스한 그 순간, 그 공간에 대해 말이다. 별 것도 아닌 것이 내 오감을 자극하고 화가 나는 그런 날이 있다. 남이 나에게, 내가 남에게 까칠하게 구는 날. 그와 반대로 오늘 이 공간에서는 누구 하나 코를 움켜쥐거나 고개를 돌리며 한껏 ㅡ아, 냄새나네.ㅡ를 뿜어대지 않을 수 있는 꽉 찬 만원 엘리베이터 속 사람들로 인해, 폭염이어도 따뜻함을 마다하지 않고 싶어 졌을 것이다.
이런 여유는 어디서 오는 걸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저마다의 뿌듯한 순간이 있다. 그녀에겐 마지노선까지 알차게 눌러 담은 쓰레기가 그랬고, 아가씨에겐 강아지와의 산책이 그랬고, 아저씨에겐 저녁 운동이, 부부에게는 아이와 산책하는 그 시간들이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그마한 일들, 남들이 눈여겨보거나 인정해주지 않는, 막말로 돈도 되지 않는 그런 일들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큰 만족감을 주는지, 그런 일들이 얼마나 작고 무수히 많은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 순간의 만족감은 자신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해지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무거운 의무감, 스트레스로부터 가벼워지고, 다른 이에게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전하지 않을 수 있는 그 마법 말이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있고, 되려 ㅡ나는 괜찮습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ㅡ라는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이 따스한 풍경이라니. 남의 허물도 혹은 실수도 힘겨움도 감싸줄 수 있을 것 같은, 가볍게 가볍게 공기 중으로 흩어버릴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라니. 끝도 없이 확대하고 혼자 즐거워하는 그녀였지만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하고 싶었다.

그녀는 이것이야말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행위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때문에..
매일의 작고 하찮은 그녀의 삶 속에서 만족스럽게 살아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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