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솔직히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나이는 자꾸 먹어가는 데 사회적 위치가 기업 조직에서 팀장급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만의 세상을 구축한 것도 아니고, 하다 못해 어딘가에 속해서 나만의 독보적인 입지를 확보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수없이 평범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보통인 나를 특이하게 내세워 주는 것이라곤 사는 곳이 스페인이라는 점 하나뿐이다. 하나 더 보탠다면, 요즘처럼 어려운 세상에, 아이를 셋이나 두었다는 것 정도가 될까? - 이 말이 나오기 무섭게 생각 없는 누군가는 다짜고짜 호구조사를 들이밀며 '아니, 어쩌다 애가 셋이에요?'라며 내뱉는 말도 여러번 들었다. 하지만, 내 주위엔 자녀가 셋인 가정이 열 손가락쯤 가볍게 넘기기에, 딱히 특이점도 아니다.
독자적이란 단어를 사전에서는 이렇게 풀이한다.
독자적 (獨自的) [명사] 1. 남에게 기대지 아니하고 혼자서 하는 것. 2. 다른 것과 구별되는 혼자만의 특유한 것. [관형사] 3. 남에게 기대지 아니하고 혼자서 하는.
1번과 2번 둘 다 혼자라는 점이 강조된다. 나는 사전적 정의에 충실한 독자적인 사람일까.
1번에서 언급하는 남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 하는 것은 그가 지닌 실질적인 능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내 역할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페르소나를 쓴다. 대기업에 근무하던 당시, 누군가에게 정보를 주고, 동시에 다른 이에게 자료를 요청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매운맛 버전으로 보면, 항상 쪼고 쪼이는 관계였다. 촘촘한 톱니바퀴가 되어 누군가와 잘 맞물리면 순탄하고 윤활유도 알아서 나와 잘 돌아갔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뻑뻑함 속에 애매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강사와 가이드는 그야말로 독자적으로 펼치는 자신만의 영역이었다. 신기했다. 이전까지의 내 역할은 중간에서 조정하는 코디네이터였고, 대시보드와 빅 데이터가 되어서 누군가 자료를 달라 하면, 즉각 제시하는 현황판이었다. 나의 쓰임새는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일과 맡은 역할이 달라지자 문자 그대로 혼자 역량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었다. 시작 전에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 당신 좀 아는데...' 하는 식으로 나는 쉽게 상처 받는 유형이라, 밖에 나가 종일 사람 상대하는 일을 하기엔 얼마 안 가 나가떨어질 거라 했다. 그들의 판단이 틀린 건 아니었다. 유리잔이자, 온실 속 화초 같은 사람이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밖에서 외출복 입다가 잠자기 전 잠옷으로 갈아입듯, 예식장에서 정장을 입어도, 운동할 때는 땀복을 입듯, 그렇게 내가 맡게 된 일에 따라 생각보다 쉽게 전환이 되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스위치 한번 딸깍에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운이 좋아 여즉 그리 험한 인간들을 안 만나서 그런 걸 수 있다. 아니면,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원래 내 안에 잠재되었던 것인데, 타이밍을 잘 타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어느 하나만이 답이 될까. 아닐 것이다.인간은 원래 복잡하다. 그런 인간이 모인 세상은 더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대상이다. 어느 한 면만을 보고 '역시 난 안 돼' 하며 좌절할 것도 아니고, 반대로 '난 이 체질을 타고났어, 이것만이 살 길이야'라며 단정 지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조력자로 업무를 잘 이어주든, 독자적으로 일을 이끌어 가든, 우리에겐 물리적 환경 (특별히, 주위의 사람)과 내 심상에 따라 스펙트럼의 영역은 무한대로 뻗을 수도 있고, 역으로 0에 수렴할 수도 있다.
2번에서 정의하는 특유하다는 건 무엇일까. 특유, 특별, 특성, 특화, 독특. 뭔가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남이 아니다. 그러니 시작부터가 나는 그와 다르다. 애당초 같아질 수가 없는 존재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그동안 남이 사는 것에 맞추어 살려했을까. 내가 나답지 못함이 가장 큰 이유이고, 나답지 못함은 무엇이 나인지에 대한 온전한 인지, 즉 메타인지가 되어 있지 않아서다.
아직도 배움에 목마른 사람으로서, 나만의 생각을 가진다는 건 쉽지 않다. 사회적인 존재로 끊임없이 사회 소식을 들추고, 남의 의견을 파악하고 내 생각을 정리한다. 말을 하다 보면, 이게 내 생각인지, 누군가에게 들은 건지, 어디에선가 읽은 것인지는 항상 헷갈린다. 그러나 그 출처가 어찌 되었건 글을 쓰다 보면, 머릿속에서 그간 묵혀오며 생각하던 바를, 내가 즐겨쓰는 어투나 어휘로드러난다. 자아는 생각을 통해, 생각은 글을 통해 자신을 발현한다. 그렇게 글은 쓰면 쓸수록 미로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길잡이가 된다.
글을 읽는 분들 중에 댓글이나 메시지, 또는 통화로 너는 너만의 스타일과 색이 있다며, 좋은 방향으로 피드백을 전해주는 분들이 있다. 신기하다. 너무나도 신기하다.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데, 그분들은 내 글을 보면 나를 안다고 (또는 알겠다고) 한다. 얼굴 한 번 못 본 분들 뿐만 아니라, 나를 직접 만나서 아는 분들도 그렇게 말씀을 한다. 그리고 그분들이 보는 나라는 존재가 - 나는 나 스스로를 너무도 지극히 평범하다 여기는데 - 그분들은 다르다고 한다.
한국에서 입시학원 강사 때도 들었던 말이고, 고단했던 해외직장 생활 중에 만나 지금까지 연을 이어가는 분들에게도 그렇고, 스페인 현지인들의 영어 교사로 있을 때도, 가이드를 하며 무수히 많은 손님들을 만날 때는 매 행사 때마다, 너는 참 다르다는 얘기를 꼭 듣곤 했다. 그게 가끔은 남자 같지 않다는 말과 동일할 때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중성 남자의 호르몬으로 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에 과했다.
익숙해질 법한데도 여전히 들을 때마다 신기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남들과 달라서, 특이해서, 결론이 '너는 이상해'가 아니었다. 본인들이 그간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이런 배경, 그런 직종, 저런 환경에 있다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어디선가 들어봄직 했을 스토리 전개, 빤한 결론, 거기에 닳고 닳았을 태도며, 꼰대가 될 나이 대의 말투가 있다(또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어서 처음엔 어색하고, 그래서 '얘는 뭐지?' 하며 이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 줘서 좋다고 한다. 더 나아가서 고맙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런 말씀을 지나가는 말로든, 뜬금없이 손 붙잡고든, 커피 한잔 하자며 얘기를 하든, 고해성사나 취중진담 하듯 그렇게 말씀을 하는 분들이 제법 있다는 게 신기하다. 대인기피증을 가질 정도로 트라우마를 갖고 있던 그에게, 마음 속 고운 빛을 보여주고, 고마운 빚도 안겨 준 분들이 많다.
내가 아는 분들은 대개가 나보다 배나 더 친절하고, 배려심 깊고, 지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분들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칭찬의 선물을 주시는 분들, 늘 느끼는 거지만, 실은 그분들의 마음이 좋은 밭이다. 아울러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덕이고, 어렸을 적 부모님께서 책값에 아낌없이 책장 칸마다 빼곡히 채워주신 덕분이다. 그게 성장해 가는 내내 성향에 영향을 끼친다.
그 생각에서 약간의 변화는 있을지라도, 천성은 잘 바뀌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현재 얼마나 지났는지 그 자리에서는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언제나 순식간이다. 그래서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문에는 늘 '입학이 엊그제 같은데'라 하고, 부모가 자식들 시집 장가보낼 때는 '너 갓난 아기 때가 엊그제 같은데'라는 회상이 나오는 게 아닐는지.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살아보니 그렇다는 것을 비로소 안다.
독자적으로 살기 위한 to do list와 tip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시 봐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이미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고, 실천 방법 또한 별 다를 게 없다. 인문학 영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것도 아니고, 자기계발 쪽으로 소정의 수료과정을 이수한 것도 아니다. 만나는 사람들 저마다의 고유한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분의 나이와 직업, 그리고 직위를 떠나 존경심이 샘솟는 경우가 많다.
순간 순간의 상황에서 나오는 글과 말을 보고 들으면, 그의 삶에서 보여지고 인품이 남다름을 안다. 환경의 좋고 나쁨을 떠나, 시간을 초월해서, 변함없이 갖는 태도와 자세가 적립되어, 궁극에는 절로 드러난다는 표현이 그의 인생에 훨씬 어울릴 거다. 그런 사람은 혼자서도 능히 서고, 세류에 휩쓸리지 않는다. 하여, 남이 자신을 옮기기 전에, 큰 그림을 보고, 또 그런 넓은 시야를 갖되, 작은 움직임 또한 세심히 신경을 쓴다. 체스 말이 아닌 체스를 두는 진정한 인생의 플레이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