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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y 21. 2021

더 나은 삶이란

주관적 행복을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노력

왜 사람들은 이동할까?

무엇 때문에 뿌리는 내리고 모르던 게 없던 것을 떠나

수평선 너 미지의 세계로 향할까?

어디서나 답은 하나겠지.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소망하며 이주한다.


-<파이 이야기> 얀 마텔


Why do people move?

What makes them uproot and leave everything

they've know for a great unknown beyond the horizon?

...

The answer is the same the world over:

people move in the hope of a better life.


-<Life of Pi> Chapter 29 by Yann Martel




Q. 더 나은 삶의 정의와 이를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있나요.


A. 더 나은 삶을 찾아 이동한다는 얀 마르텔 씨의 말에 다음의 반응이 일어난다:

'맞아, 그렇지, 정말 그래' 하면서도 곧바로 '정말 그런 걸을까, 아냐, 난 그냥 우연히 온 건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잖아' 하는 불분명한 양가감정과 생각이 불꽃을 튀긴다. 더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저자의 말에 동의와 인정보다는, 왠지 모르게 비수가 되어 나의 역린을 건드린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 그래서 영 개운치 않고, 편치 않다는 점이다. 울컥하는 감정마저 오른다. 호르몬의 영향일까. 안 그래도 남자치곤 감성이 과하다는 얘기를 어려서부터 들어왔는데. 왜 작가의 글에서 따온 몇 개의 문장이 따뜻한 봄날 이리도 마음 시리게 다가오는 것일까.


아마도 자격지심과 피해의식, 거기에 코로나에 타격을 받은 현재의 어려운 상황 등 모든 게 다 뒤섞여서일 게다. 3도 화상 환자 환부의 표피, 진피가 구분이 안 가는 상태라도 된 듯,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지금 이런 기분에 빠져 있는 것이다 라고 식별해서 판정을 내리기가 불가능하다. 차라리 덮어놓고 '지금 네가 일을 못해서 그런 거잖아'라고 퉁치며 말하는 게 마음에 통증은 있을지언정 덜 골치가 아프다. 더 파내려 가면, '돈을 못 버니까 불안해서 그런 거야'라고 보는 게, 보다 지혜로운 판단일런지도 모른다.


슬로바키아에서의 6년 동안 한국에서 온 분들, 또는 한국에서 만난 분들에게 한결 같이 듣는 질문이 있다.

어쩌다 거기 갔어요?

 

어떻게와 어쩌다는 둘 다 3음절이며 초성도 동일하지만, 전달하는 뉘앙스는 천지 차이다. 상대방이야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내지는 개념 없이) 내뱉는 말이지만, 듣는 입장에선 유쾌하진 않다. 아직 무슨 말인지 눈으로는 알겠는데 감이 오지 않는다면 다음 문장을 자문해 보시길 : 어떻게 글을 쓰고 있나요? 어쩌다 글을 쓰고 있나요?


나름 관심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저런 안 됐다 쯧'과 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출발 선상에 있다 - 남을 내 아래에 두는 것이다. 지금은 그냥 남 얘기하듯 나도 배시시 웃으며 얘기하지만, 그때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왜 그렇게 빈정이 상했는지 모르겠다. 세상이 나와 다른 건 당연하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언짢음과 함께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은 떠오르지만, 신입이고, 어리바리해서 말할 타이밍도 그렇게 말할 배짱도 갖지 못했다. 뒤늦게 마음에서 끓이며 '두고 봐라. 여봐란듯이 잘 살 테니.'라는 소심한 복수의 날만을 벼리고 말았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했다. 성실히 했고, 잘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노력한 대가는 상과 남다른 평판으로 이어졌고, 생각 못한 결실이 스페인으로의 이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절하리만큼 쓴 맛을 보았다. 결심과 계획과는 정 반대로 어디가 끝일지 모를 정도로 수직낙하를 했다. 약간의 비막이라도 있음 떨어지는 순간 조차,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기분이라도 내보련만, 현실은 대기업 내 한 퍼즐 조각에 지나지 않는 개인의 심정 따위에 신경을 쓸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이후의 영어 강사로의 전환은 숨 막히는 사무실에서 겪은 트라우마에 대한 정신적 보상이었다. 거기에 문화 가이드로의 천직을 얻은 건 재정적 보상까지 받은 셈이 되었다. 그러다 다시 코로나로 막히게 되자,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이래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억지로까지 웃으며 정도로 나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건 아니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들 덕에 그냥 보고만 있어도 너털웃음이 나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터널 중에 있기에, 다시 빛을 보게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마음을 써 내려가며 글을 쓰는 중이다.


객관적인 더 나은 삶이 있겠지만, 그 목적이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결국 판단은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이라 함은 결국 내가 주인이 되어 보는 관점이다. 내 곁에 무수히 스쳐 지나가는 손님의 눈에 보이는 것에 그리 신경 쓸 이유도 없고, 그들이 생각 없이 별 필터링 없이 내뱉는 말에 내 인생이 뿌리째 흔들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평생을 봐온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를 때가 많은데, 고작 몇 번 보고, 몇 년 본 것으로 어떻게 나를 알아서 이게 더 낫네, 저게 더 좋은 거 아니냐며, 내 삶을 재단할 수 있겠는가. 한 번 들어는 볼 수 있으되, 거기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


그럼에도 행복을 위한 더 나은 삶은 분명 존재한다. 유엔 산하 기구에서 매년 발표하는 World Happiness Report를 보면, 2017-2019년 10권 안에는 뉴질랜드 하나를 제외하곤 모두 핀란드, 덴마크, 스위스 등 유럽 국가였다. 그럼에도 또 의외인 점은 한국, 중국, 일본은 경제력에 있어 상당히 우위임에도 불구하고, 낮은 순위에 있다는 점이었다. (스페인 28위, 한국 61위, 일본 62위, 중국 94위) 하지만, 국가라는 큰 단위에서 도시별로 쪼개면 또 다른 얘기가 나온다. 결국, 얘기는 돌고 돌아, 더 나은 삶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노력이 함께 필요함을 보여준다.


오늘도 아이들 등하교 길을 같이 걷는다. 집에 오면 수저를 놓으며 상을 차리고, 식사를 마치면 식탁을 훔치고 식기세척기에 차곡차곡 넣는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거두어 볕 좋은 곳에 털어 넌다. 첫째와 학업 상담을 하고, 둘째의 시험공부와 숙제를 봐주며, 막내에게 책을 읽어준다. 따스한 문장 필사방의 커뮤니티와 팀라이트 작가님들 단체방에서 짬짬이 얘기를 나누고, 친구들과 카톡 메신저며 보이스톡으로 통화도 한다. 시간을 들여 글을 쓰고, 댓글을 보고 늦게 답글을 단다. 그렇게 살아간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꾸준히 즐겁게 반복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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