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才能) [명사]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훈련에 의하여 획득된 능력을 아울러 이른다.
즉, 단어 자체는 [재]주와 [능]력을 합친 말이고, 의미의 범위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뿐만 아니라, 후천적인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의 수준에 달성한 기량 또한 재능이라 칭한다. 특별히, 우리는 재능 앞에 '하늘에서 내려줬다'는 의미로 <천부적天賦的> 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본인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나 노력에 앞서 일단 위로부터 능력을 물려받았거나, 갑작스레 주어진 것으로 본다. 그런 능력을 지닌 자는 남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비교적 쉽게 해 내곤 하며, 세간의 관심을 받는다.
영어권에서는 조금 다른 어원을 가진다. 영어, 불어, 독어로는 Talent라고 하고,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에서는 talento라고 하는데, 이는 모두 고대 그리스에서 일반 금속이 아닌 값비싼 금과 은을 세는 단위인 talanton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이 말이 라틴어로 talentum이라 했고, 지금까지 옛 모습 거의 그대로 간직하며 talent(o)로 정착했다. 일반 광물이 아닌 찾아보기 힘든 은과 금을 세는 데서 기원을 둔 단어는 흥미롭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무수한 돌무더기에서 금가루를 발견하듯, 평범한 군중 속에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장, 변형되었다. 영어는 신에게서 받은 선물이란 의미로 gift를 사용하기도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졌건, 뮤즈에 의해 영감을 받았건, 부여받은 능력 외에 현대의 우리는 고도의 개발과 집중적인 훈련, 즉 개개인의 부단한 노력에 의한 산물 또한 재능으로 인정해 준다. 열심히 공부해서 각종 자격증을 따내듯 나의 관심사를 하나씩 발견하며 넓히고, 그에 따른 능력을 키워내고, 이를 인정받는 것은 대단한 동기부여가 된다. 이를 두고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Le désir de l'homme trouve son sens dans le désir de l'autre -Jacques Lacan
언어 재능?
나는 배우는 걸 무척 좋아했는데, 그 모든 원동력은 선생님들의 칭찬이었다. 자크 라캉의 어록은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나에게만큼은 절대적이었다. 그중에서도 국어, 영어, 불어, 한문과 같은 언어가 무척이나 끌렸다. 중고등학교 당시 그 과목의 선생님들의 칭찬이 유독 다른 과목 선생님들에 비해 컸기 때문이다. "너 참 잘한다. 넌 오늘부터 영어 학습부장이야. 수업하기 전에 교무실로 내려와서 카세트 챙겨가렴." 중학교 3년 내내 영어 과목 박은숙 선생님의 칭찬은, 어찌 보면 말씀과 함께 심부름에 불과했지만, 어린 나의 어깨에 뽕을 넣어주었다. 당시 교학사 카세트 테이프에 나오는 미국인의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끔 발음 연습을 하고, 필기체까지 열심히 따라 쓸 정도였다.
물론 그 은사님들 외에도 어렸을 적 수십 번도 넘게 본 <먼 나라 이웃나라>의 영향도 상당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1987년도에 처음 6권으로 나왔을 땐 프랑스가 1권이었는 데다, 유독 프랑스어 단어며 문장이 많이 나온 덕에, 영어만 알던 내겐 신세계였고, 그 관심은 외고와 대학교에서 모두 프랑스어를 전공하는 데까지 이끌었다.(그런데 왜 슬로바키아와 스페인에 간 거죠? -원래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어) 쉽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어를 배운 덕에 슬로바키아며 스페인에 있는 동안 다른 유럽어들도 즐겁게 접근하고 재미있게 익힐 수 있었다. 점수가 아닌 알음알음 앎의 세계를 즐겁게 넓혀 보고자 접근한 걸 보고, 사람들은 도대체 몇 개 국어를 하느냐고, 언어 능력자 아니냐고 묻는다. 알겠지만 관심과 점수는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언어 능력자라는 말은 만들어낸 말일뿐이다. 한국인 중에 한국어 천재를 본 적이 있는가. 그 환경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하듯, 외국어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남다른 관심과 흥미가 그 사람을 좀 더 오랜 시간 그 언어를 탐구하고 생각하고 활용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이 판단하는 언어에 대한 나의 재능은 기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어에 보인 관심의 산물로 여기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그랬기에 겁도 없이 원어민이 넘치는 스페인에서 TEFL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해, 현지 기업체의 영어 출강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직업에서 발견한 재능
외국어를 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계를 열어줄 문의 열쇠를 쥐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언어에 대한 관심은 언어에만 그치지 않는다. 역사, 문화, 경제, 종교, 음식, 예술, 관습 등 그 나라의 모든 문화유산을 아우르는 근원이 된다. 그렇기에 언어에서 촉발된 관심은 무수한 가지치기로 뻗어 나가며 그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커져 간다. 그렇게 해서 직장인에서 벗어나 문화 가이드로서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발을 딛게 되었다. 일주일 단위로 버스를 바꿔 타면서 수년에 걸쳐 만난 각계각층의 손님들에게,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듣는다.
버스 타고 가는 동안 스페인과 유럽의 역사 얘기를 하면, 이건 강의라며 스페인의 설민석이라고들 추켜세운다. 스페인어를 소개하며 유럽의 언어들을 꿰어 설명하면, 학교 다닐 때 과외받았더라면 자기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고 농반진반의 말을 건넨다. 미술관에서 작품마다 담긴 배경과 내용, 화가의 이야기를 엮어 드리면 도슨트냐는 질문을 받는다. 성당에 입장해 기독교의 교리와 상징, 의미 등을 종교에 대한 거부감 없이 품격 있는 교양 차원으로서의 접근을 도와 드리면, 사제인지 선교사인지 정체를 밝히라는 추궁도 듣는다. 일정 중 그늘 아래에서 여유 있게 아이스커피와 함께 쉬고 있노라면, 천상 한량이라고 좋겠다며 부러워한다. (머릿속에선 다음 일정 시간 계산하며 열일하는 중인데) 40편의 스페인 문화 칼럼 글을 도시에 맞춰 읽어드리면, 감성 작가라며 책 출간 기다리겠단다. 스페인 음악과 클래식을 그에 얽힌얘기와 함께 선곡해서 들려 드리면, 별밤지기 디제이라며 신청곡이며 사연을 카톡으로 보내온다. 나는 무엇일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하나이다. 유럽의 미술관과 성당들은 어렵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깨고, 재미있으면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게,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해 주는 사람. 그래서, 여행 일정 동안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감성 문화 가이드. 유시민 작가가 본인은 지식소매상이라 소개하듯, 나는 문화소매상이 맞겠다. 쉽게 풀어내는 재능 또한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남들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스스로 질문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깨닫고 얻은 결실이다.
음악의 재능
초등학교 3학년부터 배운 피아노도 그랬다. 아파트 단지 내 피아노 학원에 언제나 화려한 황금빛 사자머리를 하고 다니시는 원장 선생님에게, 원장실에 단 한 대 있던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높낮이 조절되는 견고한 가죽 의자에 앉아, 다리도 닿지 않는 상태에서, 체르니 30번이며 소나티네를 칠 때 (겨우 걸음마 뗀 정도의 수준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분이 아낌없이 내려주시던 칭찬은 국민학생 시절 장래희망에 <피아니스트>라고 적을 정도로 내 꿈을 키워주셨다. 한편, 아버지께서 애지중지하시던 인켈 전축과 LP판 덕에, 어렸을 때 나는 가요는 거의 모르고, 오로지 아는 건 딱 두 장르였다: 이미자 선생님의 <동백 아가씨>,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 또는 <청실홍실>과 같은 뽕짝, 아니면 비발디의 <사계>,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등 클래식.
그러다, 어렸을 적 친구와 다름없던 피아노를 아버지께서 이제는 공부에 집중해야 된다며 중3 때 팔으셨다. '어머나, 피아노가 없어졌네? 그럼 다른 악기를 해야겠구나!' 하는 심산으로 배우게 된 게 다름아닌 오보에였다. 어려서 뭘 모르니까 배웠지, 이 악기가 이렇게나 힘든 줄 알았더라면 절대 안 배웠을 것이다. 오보에 앞에 꽂는 심히 좁은 틈새의 더블리드는 악기를 부는 즉시 관자놀이에 힘줄이 빡하고 서고, 볼은 터질 듯 시뻘게지며, 눈알은 튀어나올 듯 압력을 받는다. 전공자는 어떨지 몰라도, 아마추어라면 사랑하는 이 앞에서 분위기 있게 불러주기엔 심히 민망한 악기란 말이다. 하지만, 그 음색은 정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가 없는 마성魔性임에 틀림없다. 유튜브에서 <Gabriel's Oboe>를 검색해서 한 번 들어보시라. 단언컨대, 다른 어떤 악기도 원곡의 악기인 오보에에 미치지 못한다.
피아노와 오보에 덕에 고등학교 기악반과 대학교 오케스트라 동아리에서 음악에 푸욱 빠지는 행운을 누리고, 즐겁고도 재미나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도 많이 가졌다. 학교에선 지휘를 배워보고, 교회에선 퍼커션을 익히며, 코드 반주법도 독학하면서, 아마추어 음악도로서의 소양을 갈고닦았다. 첫째를 낳고 난 후 슬로바키아에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없던 나와 아내에게 피아노는 실로 고마운 존재였다. 그런 피아노와의 인연은 스페인에 왔을 때 더 꽃을 피웠다. 한국에서는 집집마다 피아노가 있을 정도로 보급률도 높았고, 교회 성가대에선 전공자들이 넘쳐났지만, 스페인 교회에선 피아노 치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아니, 없었다.
한국에서라면 '어디서 피아노 좀 치나요?'라는 말에 선뜻 '네'라고 답하기 어렵지만, 스페인에선 조금 msg를 보태자면, 양손만 쓸 줄 알면 바로 피아니스트라며 환호할 정도다. 그렇게 스페인 교회에 가자마자 바로 피아노 반주자가 되어 지금까지 기회가 닿는 대로 섬기고 있다. 한국교회에서는 '반주 봉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사실 스페인에선 그런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심플하게, 피아노를 치는 것이다. 물론 아무런 악기도 없이 아카펠라 풍으로 하다가 피아노가 들어가면 그날 회중의 반응은 유난히 다르다. 그렇지만 그들이 좋아하기 이전에, 그분들의 진심 어린 칭찬이 있기 이전에 피아노를 연주하는 내가 먼저 즐겁고 기쁘고 감사하다.
무명의 한국인 아재가 스페인 교회 합창단을 만나 교회 개혁 50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연주하는 영광도 가져 보았다. 30년 전 피아노를 처음 배운 꼬맹이가 이렇게 스페인이란 나라에서 연주회를 가지리라고 감히 상상이나 해 보았을까. 끝없는 연습 속에 오르간 연주곡은 암보까지 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성취감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었다. 천부적 재능이라면 이런 환희를 맛볼 수 있었을까. 가진 적도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 희열은 오로지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기에 가능했다.
결론
재능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보다, 노력을 기울여 얻은 능력치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어떻게 그것을 달성했는가 보다 더 관심을 가지는 건, 왜 그 사람은 그렇게까지 애를 썼는가이다. 그것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그의 사랑보다 클 수 없기 때문이다. 외국어건 공부건 악기건 간에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재능은 소비가 아닌 생산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나눔이 되기에 더 큰 의의를 가진다. 어렸을 때건 나이 들어서건 인생의 타이밍에서 저마다 발견한 재능을 늙어서도 잃지 않으려 한다. 고집이나 의지가 아니다. 그저 사랑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