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놓치지 않는 희망
이루마의 곡은 특별하다. 그의 곡은 언제 들어도 상쾌하면서도 따뜻해지는 오묘함이 숨겨져 있다. 집중이 필요할 때뿐만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한 느낌의 은은한 배경음악으로도 손색이 없다. 오래 들으면 질릴 만도 한데, 다음 날 다시 들으면, 익숙하면서도 처음 듣는 느낌으로, 기분 좋은 시작과 후회 없는 마무리를 짓도록 도와준다. 슬로바키아에서 한창 삼성맨으로 뛰던 시절, 통근 버스에 몸을 실으며 오가던 때, 그의 음악은 내게 일상 routine이자 사무실에서의 처음과 끝을 열고 닫는 일종의 의식 ritual과도 같았다.
이루마의 곡은 거의 전부일 정도로, 과한 꾸밈이 없다. 그러기에 더욱 진한 감동이 일렁이는 반전이 있다.
비슷한 선율의 반복이 있지만, 그 돌고 도는 멜로디는 라벨의 <볼레로>를 들을 때보다 더 간절한 기대를 갖게 한다, 바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CD 앨범이든 MP3든 들을 때면, 그냥 한 곡 재생으로 놔두곤 했다. 그의 곡에 빠져드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유튜브에서도 이루마의 곡을 검색하면, 단 한 곡만으로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연속 재생 영상이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역시 그의 명곡이자 오늘의 주제곡인 <May Be>를 연속 재생 중이다.
이루마의 곡은 단순히 쉬운 멜로디에 그치지 않고, 감동을 주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방탄소년단의 효과가 한류 정도에 끝나지 않을 것처럼. 잘생긴 방탄 멤버들 덕에, 그들의 진솔함이 담긴 가사 덕에 전 세계의 아미 Army들은 한글을 독학해서 한국어를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이루마의 곡 덕분에 피아노를 배워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다. 취미 피아노 입문자 보다 더한 간증(?)도 있다.
부모의 등쌀에 떠밀려 억지로 피아노를 배웠다가 결국 때려치운 학생들, 어릴 땐 어떻게든 쳤지만 크면서 차츰 멀어지고만 어른들, 이처럼 피아노를 떠난 어린양들을 다시 피아노 앞으로 데려오게 한 것이다. 먼지 앉은 피아노의 커버를 다시 열고, 그리움 가운데 오선지를 한마디 한마디 읽어가며, 건반을 다시 만진다는 간증이 댓글에 제법 있다.
그러니, 전 유럽에서 디지털 피아노 시장을 꽉 잡고 있는 야마하는, 팬데믹으로 실내 취미가 늘어서 매출 증가 덕을 봤다 말하기 이전에, 일단 십수 년 전부터 각 가정에 피아노 붐을 일구어 놓은 이루마 씨에게 감사해야 되지 않을까. 책을 읽다가 독자를 넘어 이참에 작가가 되어 글을 써 볼까, 책을 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서 도전하게 된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카카오 브런치 서비스의 출범 덕이듯 말이다.
이루마는 자신의 곡 <May Be>에 이런 글을 남겼다.
5월이 오면 새로운 만남을 기대해 봅니다
그 옛날 그녀와 처음 만나던 때처럼, 그날처럼...
-이루마
플랫♭이 무려 다섯 개나 붙은 곡이지만 (흰건반 보다 검은건반을 많이 친다는 얘기로 나름 난이도가 있는 편), 그럼에도 이미 익숙한 선율 덕에 <River flows in You>, <Kiss the Rain>과 함께 취미로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곡이 되었다. 작곡가는 5월의 May와 아마도의 maybe를 같이 넣어서, 5월이면 아마도 어찌어찌할 것이라는 희망을 띄워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청량감을 주면서도 계속 시원하게 밀고 나가기만 하지 않고 적당한 기다림을 남긴다. 또한 선명한 주 선율이 제시되고 나면, 바로 이어 한 옥타브 위에서 화답하며 주고받는다. 이런 멜로디는 안개 자욱한 아침, 산책 나온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숲 속 새들이 지저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왼손 없이 오른손만으로 진행하는 오선지 아랫줄의 솔♭에서 시작해 라♭-시♭-레♭-미♭-솔♭로 한 옥타브를 차분히 올라갔다가, 꾸밈음을 이용해 라♭에서 바로 옥타브 아래 라♭로 내려가는 16-18 마디는 피톤치드 가득한 침엽수림에서 갑자기 호수가 나타나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산들바람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D♭ 장조(내림 라장조)의 곡들은 전반적으로 매혹적이면서도 고요함을 전하려는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편인데, 이루마의 May Be를 들어보면 그야말로 완벽하게 들어맞음을 알 수 있다. 잔잔한 가운데서도 오래도록 여운이 감도는 향 짙은 선율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아침에 따뜻한 커피 한 잔 내리면서, 저녁에 상쾌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그려보기에 더없이 적합할 것이다.
5월의 시작이 아닌 끝에서 이 곡을 들어본다. 5월 초에 이 곡을 들으며 희망을 품어보기엔 시기상조였다. 실은 지금도 별 다를 바 없다. 코로나로 달라진 일상을 1년 이상이나 지나온 지금, 코로나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건, 철딱서니 없는 어른으로 취급받기 딱 좋다. 그럼에도 나는 변함없이 소망한다.
일 년 전, 이 곡을 연주하고 녹화할 때만 해도 정말 늦어도 새해를 맞이할 때 정도면 돌아갈 줄 알았다. 심적으로 워낙 힘든 시기였기에, 힘듦 이상의 간절함으로 희망을 노래했고 회복의 염원과 기도를 그친 적이 없었다. 곡을 연주하며 그 당시의 심정을 적은 글을 보니,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의 웃음이며 사랑하는 가족의 건강, 그리고 벗들과의 만남은 이루어졌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정말 엄청난 진전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망한다. 그때 그 기도문을 쓰던 마음과 한치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싱그런 오월에는
이렇게 해 주세요
티 없는 아이들,
밝은 웃음 되찾기를
사랑하는 가족들,
오래도록 건강하기를
보고 싶은 친구들,
얼굴 보며 손과 손 맞잡아 보기를
학교와 직장, 거리와 공원,
삶의 터전 곳곳에서
잃어버린 일상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상실의 슬픔보다
회복의 기쁨으로 가득하기를
그리하여
이 모든 소원이
나약한 자의 실낱같은 바람이 아닌
언제나 그 자리에서 지켜보는 하늘이기를
잿빛 구름 가득했던
소나기 그치고 나면
푸른 하늘 가득 드리우는
영롱한 무지갯빛 희망이기를
봄빛 가득한 오월
싱그런 오월에는
스페인 한량의 이루마 <May Be> 연주 영상 들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