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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un 12. 2021

쇼팽이 그리는 빗방울 낭만여행

빗방울 전주곡 작품 28-15 D flat 장조

ㅡ여기 한국은 비가 계속 온다. 거기 스페인도 그러니?

ㅡ어휴, 비는 무슨. 여긴 이제 비 더 안 와. 완전 햇빛 쨍쨍해.


어제 친구와 통화할 때 나눈 얘기인데, 오늘 밤 거짓말처럼 비가 온다, 허허.

나 완전 거짓말쟁이 다 되었네. 스페인의 날씨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나마 낮이 아니라 늦은 밤이라 체면은 섰다.


내게 비 오는 날씨는 언제나 둘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 아니면 이루마의 Kiss the rain.


두 곡은 전혀 다른 성격이다. 짙은 유화와 산뜻한 수채화 또는 수묵담채화의 대립을 보는 기분이다.

그래서 언제나 두 곡을 다 들어 보며 응어린 가슴도 풀어보고, 한때의 회상에 젖기도 하며, 언제나 피날레는 기분 좋게 털고 일어난다. 말없는 음악이 주는 공감의 힘이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은 대학교 2학년 때, 봄 연주회 곡으로 연주했을 정도로 애착이 크다. 학교에 음대가 없다 보니 어지간한 학교에는 다 있는 그랜드 피아노 하나 없었다. 업라이트 피아노에 찢어진 레자 의자가 놓여 있었을 뿐이다.


아쉬움은 있지만, 마음만은 쇼팽의 끊임없는 8분 음표 A flat 마냥 절절했다. 집안에 갑작스러운 변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험 성적에 쌍권총을 찬 것도 아니었다. 애인이 있다가 차인 건 더더욱 아니었다 - 늘 여초 집단에서 있던 터라 남자로서의 존재감은 제로였다, 완벽하게. 여하간 이유는 모르겠다.


글처럼 내 생각을 직접적으로 읽어줄 수도 없고, 분명한 노래 가사로 귓가를 울릴 수도 없었다. 오로지 선 위의 음표와 쉼표만이 만들어 가는 흑백의 채움과 비움이 전부다. 그 공간에서 피아노 건반이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5분간 만큼은 1800년대의 쇼팽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Oculus Quest 2를 쓰고 마요르카로 날가 프레데릭 쇼팽과 조르주 상드를 만난다. 둘 다 예술가답게 순탄과 평탄의 탄탄대로보다는 고비와 위기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탄다.

 

Prelude "Raindrop" Op.28 No.15 D flat Major


클래식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클래식에 빠져들고 피아노를 배우며 동경의 대상이 된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릭 쇼팽. 프랑스어를 전공하며 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의 문학과 그녀의 정신세계도 배웠다. 덕분에 연인으로서의 쇼팽과 그의 음악에 대한 이해도를 한층 더 높여볼 수 있었다.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으로 자신의 연인과 연인의 자녀들을 데리고 휴양차 떠난 쇼팽은 그곳에서 생각지 못한 변덕스러운 날씨에 도리어 몸을 크게 상하고 만다. 주민 조차 결핵환자에 이교도라며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던 환경이라 마음마저 상처를 입는다. 한 사람에게만 미움을 받아도 트라우마가 되는데, 주민들에게 타박을 듣는 입장이라면 이미 알코올 중독에 폐인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 모든 서러움과 원망을 악보에 옮겼다. 암울한 상황에서도, 도리어 우울한 일상이 될수록 쇼팽의 악상은 멈추질 않고 펜을 쥐게 만들었을 것이다. 후대에 연주자들이 그의 작품을 대할 때 마냥 아름답다고만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병마의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의 힘으로 버텨낸 그의 투쟁과도 같은 삶이 오선지 음표로 점철되어 있다. 마요르카의 마을 발데모사에서 카르투하 수도원에 묵는 동안, 상드는 쇼팽을 위해 물품을 사러 나갔다가 거친 비바람 속에 그만 발이 묶여 버렸다.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난 연인을 두고 쇼팽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은 상드의 도착을 지연시키는 불안 가중 요소임과 동시에, 쇼팽에게 악상을 떠올려 주며 불안감을 떨쳐 주는 진통제로서 양가감정을 느끼게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쇼팽과 상드의 관계는 좋았다가도 상드의 아이들 때문에 이내 날을 세우고 마는 극단을 오가는 상태였다.


멀리 떨어진 연인 사이에 비라는 건 사랑하는 이에게 전해주지 못하는 본인의 마음을 대신 전해주는 메신저이다. 비가 그대 창가에 뿌려질 때마다 당신을 보고픈 내 마음을 알아달라며 달달하게 접근하겠지. (쓰면서 손가락이 오그라들고 있다.)


위기 사이의 연인과 부부에게 비는 무엇일까. 구질구질과 질척질척, 거기에 비에 젖은 옷으로 몸마저 으슬거리며 춥게 만드는 불편함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 당사자들에게는 음악이니 뭐니 이럴 거 없이 그저 한마디, '라면 먹고 갈래?' 하나면 충분할 텐데. 후후 불며 목에 넘기면 속에서 따뜻하게 채워주는 어묵 국물이 있다면 더 좋겠는데. 우리처럼 국물 요리 발달했다면 둘의 관계도, 곡의 색깔도, 확연히 달라졌을 거라는, 엉뚱하지만 나름 근거 있는 상상을 해 본다.




시작부터 종결부까지 전체를 관통하며 일정하게 두드리는 A flat은 처음에 장조 선율에서 반내림의 편안함을 준다. 중반부에 단조로 전환하자, 반올림의 G sharp이 되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고, 창문을 두드리는 게 부수로 들어오는 해머가 된다.


빗방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바람 때문에 속도와 양의 차이가 있지만, 본질은 자연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그걸 받아들이는 마음이 비를 사랑의 메신저로 전할지, 불안의 구덩이로 떨어뜨리는 함정이 될지, 생각도 하기 싫은 암적인 존재가 될지는 오로지 청자가 정한다.


기분과 마음에 따라 편한 장조에 내려 두거나, 불안한 단조로 올리거나 할 따름이다. 집 나간 연인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을 쇼팽의 심정은 비슷한 멜로디의 반복 속에 더욱 격렬한 단조의 선율로 빠져든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몰고 갔던 감정은 찻잔의 태풍에 그친 듯 다시 장조의 선율로 옮겨간다. 제자리를 찾아 우울한 여정을 낭만 가득한 처음의 목적지로 안내한다. 약하디 약했던 낙수는 폭우가 되어 온몸을 적셨지만 결국 화창하게 갠 날씨 속에 아름다운 추억만을 남겨놓고 사라지듯이.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시작은 평온했다. 하지만 진행은 음울했고, 과정은 힘겨웠다. 그러나 마지막을 기다리는 건 우울의 연장선이 아니다. 본래의 밝고 맑은 선율을 찾아 화평 속에 갈무리하는 쇼팽이다. 평생을 우울질로 살아온 그가 내면의 희망을 안고 그려낸 빗방울의 낭만 여행이다.


기나긴 격리의 시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를 실의와 분노로 만들었던 코로나.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선율에 흘려보내고 희망을 찾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란다. 피아노가 전하는 빗방울의 공명이 잠시나마 당신을 낭만으로 인도하기를 염원하며.



-스페인 한량이 전하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입니다. 영상 들어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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