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세 자녀 한 달 아빠 육아 3

욕심을 버리면 됩니다

원래는 하루에 하나씩 연재하려고 했다. 국민학교 방학이면 일기 숙제를 써내듯 말이다. (요즘 초등학교도 그런가요?) 그래도 명색이 브런치 작가인데, 하루 글 하나는 해야지... 완전 오판이었다. 참고로, 어렸을 적 내 일기는 부모님도 보시고, 담임 선생님도 보시는 것처럼, 지금의 브런치 글 역시 아내와 부모님께서도 읽으신다. 참, 예전에 글쓰기 강의에서 본인의 글은 절대 책 출간 전에 보여주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는데, 해외에 사는 내 경우엔 살짝 예외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보는 글이라니. 그러면 사전이든 사후든 검열이라는 게 있지 않겠는가 하겠지만, 아내와 부모님 누구든 꼬집어 언급한 적이 없다. 그분들이 뭐라 하기 전에 내가 알아서 자체 검열을 하기 때문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육두문자만 구사하지 않는다면, 딱히 가문의 치부랄 것도 없는, 다 거기서 거기인 더도 덜도 하지 않는 그저 평범한 소시민, 주변인의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간, MZ 세대 아빠의 육아일기 정도는 아니더라도 (굳이 밝히자면 X세대 끝자락 인터라 아무리 스스로 부인한다 하더라도 꼰대 성향을 지우기는 어렵다), 이런 류의 글을 쓰려고 한 건 아내와 7시간의 시차를 두고 있어도, 가까이 있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였다. 장문의 글을 접하고 행간에서 남편의 생각을 읽어내는 건, 카톡에서 아이들 방긋방긋 웃는 사진과 곰살맞은 이모티콘 범벅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설령 빤한 주제와 깨달음, 때로는 신파극이 될 소재라 할지라도, 한 달 반의 기간 동안에도 변함없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글을 통해서 아이들의 일상과 나의 하루 중 특별한 사건을 묘사하거나, 하루 전체를 그저 시간별로 일지 적어가듯 소상히 전하는 일. 글타버스 (글+메타버스: 현실과 가상세계가 혼합된 공간)를 느껴보게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 조금 더 작가다움을 가미한다면,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전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아내가 떠나기 전날, 당신이 없는 한 달 동안 아빠 육아 일기를 연재하며 아이들에게 추억의 앨범이자 나에겐 성찰의 계기가 되는 글을 써 보겠노라고 했다.




2주가 지났다. 아니 보름도 더 지났다. 그 사이 브런치에서는 꾸준함이 재능으로 거듭날 수 있다며 나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달라고 볼수록 미안해지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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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브런치의 선한 의도와 달리 나를 직시해 보니 육아 글을 쓰려는 것은 허울 좋은 욕심일 뿐이었다. 아내를 위해 글을 써? 의미를 넣고 통찰도 해? 명분은 좋네. 작가병에 걸려 글쓰기를 핑계 삼아 육아를 소재거리로 우려내 먹으려는 건 아니었나 하고 돌이켜 본다. 이 정도로 날 선 비난을 퍼붓는 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수용해서 잘 풀어나가려는 나를 보지 못해서였다. 당장의 귀찮음과 게으름 사이에 육아와 가사를 회피하려는 나의 방어기제를 글쓰기로 삼으려는 게 아닌가 해서이다.


하나 더 파고들면, 실은 쓰고 싶은 글만 있는 게 아니라, 언질을 주고, 약속도 했으니 마땅히 써야 하는 매거진들의 글이 있는데 그걸 미룬 지가 몇 주째인지 가늠이 안 잡힐 정도로 못 쓰고 있어서다. 그런데도 아몰라 난 일단 이게 좋아, 지금은 이게 더 당기네, 이거부터 쓸 거야, 영감이 안 솟는 걸 어떡해, 좌측 깜빡이 켜고 우측으로 갈 수는 없는 거잖아 하면서, 자신의 무기력과 게으름을 아무말대잔치의 조합으로 합리화하는 건 아닌가 하고 화들짝 놀라 돌이켜 보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가 아니라, 부질없는 욕심이라는 건 아내가 자리를 비운 당일 저녁부터 바로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다섯 살 막내의 간헐적 울음 때문인데, 사실 대책이 없다. 그나마 갓난쟁이는 지나고 말이 통하긴 하지만, 그래도 잠깐만 넘기면 바통 터치할 절대자, 엄마가 있다는 것과 한 달 이상은 어림없다는 상황과는 천지차이이다.


엄마가 보고 싶어 우는 건 아이 잘못이 아니다. 아이에겐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우는 게 귀찮고 짜증이 난다고 무조건 먹는 걸로 돌리거나 유튜브 영상으로 대신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다섯살배기와 차근차근 대화의 기술로 엮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이의 설익었지만 생생한 감정을 아빠가 늙은 어른의 다 식어빠진 감성으로 에두르다니, 가당키나 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래 네 말이 맞다고 말해주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래,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우는구나, 아빠도 엄마가 보고 싶어." "아이고, 울 막내 엄마 생각나는구나, 그래 아빠도 엄마 생각나네."라고 말하며 등을 토닥여 주고 그저 꼭 안아주는 것. 그게 나이 먹어 비로소 육아를 해 보는 아빠의 어설프지만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이는 신기하게도 더는 훌쩍이지 않고 서서히 잦아들다가 마침내 그쳤다. 잠시 후 책을 가져와서 읽어 달라고 했다. 엄마가 보고 싶다며 보채던 간헐적 울음은 고맙게도 이틀 만에 그쳤다. 울음 대신 밥 먹다 물 찾는 것처럼 수시로 엄마가 보고 싶다와 엄마가 생각난다는 말을 했지만, 말은 한 것으로만 끝났다. 징징 짜거나, 떼를 쓰거나, 악을 내지르고 뒹구르는 2차 3차의 콤보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 집에선 딱히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게 모델 하우스 광고 마냥 하하하 웃음꽃만 활짝 피는 건 아니다. "야~악!" 하며 난데없이 태권도 기합을 내지르기도 하고, "쓰읍~" 하며 방울뱀에 빙의되는가 하면, 어금니를 깨물며 "내가 그르지 멀랬지, 엉! (그럴 줄 몰랐지 아님)" 하면서 으름장도 놓는다.




그러다 알았다. 처음부터 아이들에게 맞춰 주면 소리 지를 일이 없다. 더 적나라하게 직시해 보니, 고함을 내지르는 건 결국 다 내 욕심이 원인이었다. 애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고, 저 사달이 터지기 전에 처음부터 조곤조곤 통제 대신 중재를 서고, 간섭이 아닌 코치를 한다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다. 그렇게 애들을 조용히 시키면, 내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상황이 된다면, 그 좋아한다는 글을 쓰겠지.


아니, 고상하게 글이랄 것도 없이 인스타와 페북 소셜 미디어를 누비고 다니며 좋아요를 찍고, 이모티콘 가득 넣어 댓글을 달며, 브런치에서 좋아하는 작가님들의 생각 육수 푹 고아낸 글을 후닥닥 읽고, 유튜브에서 흥미진진하고도 재미 가득한 영상을 보며, 이 모든 것을 아내의 잔소리와 간섭 일절 없이 (뭐, 시간에 맞춰 알아서 잘하고 있었기에, 있던 적도 딱히 없다. 푸흡) 아이들이 있지만 없는 것 같은 완벽한 곳에서, 대낮에도 나만의 시간을 제대로 누리고 싶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욕심.


"아니, 그게 뭐가 욕심이야, 엄마 아빠도 쉬어야지, 안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애를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두고서 없는 듯이 지내려 하거나, '아휴, 셋 다 볼 거 없이 얘 하나만 챙기면 돼'라는 식으로 하려는 게, 욕심이 아니면 대체 뭐라 할 것인가.


한 번 더 곱씹어 보니, 남의 자식도 아니고 내가 내 자식 키우면서 여기저기에 저 이렇게 고생합니다 라며 티를 내는 것이... '와, 나는 애들의 아빠는 고사하고 그냥 어른도 안 된 철딱서니 없는 애였어, 애.'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낳은 것도 아니고 키우는 것이고, 한 아이당 20년에 밑으로 내리 몇 년 더 이어 뒷바라지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인턴 수습 기간도 안 되는 한 달 반 밖에 안 되는 시간을 보내면서, "저 좀 보세요, 여러분~" 하는 것 자체가... 그냥 관종의 끝판왕을 자처했네, 세상에.


뒤늦은 깨우침에 후회는 낮술 한 사람 마냥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독거노인 댁 자원봉사도, 땀내 가득한 가을걷이 체험 삶의 현장도 아닌, 내가 내 집에서 내 새끼 키우면서 내 시간 없다고 투덜대는 나란 새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아이들 개학 후 매일 챙겨보는 <금쪽같은 내새끼>는 그냥 내 가정의 복사판이다. 정도와 수위가 다를 뿐, 마치 MBTI 유형검사 결과, 난 분명 ENFJ 인데도 어쩐지 정반대 ISTP를 봐도 몇몇은 얼추 맞는 거 있네 하는 것처럼. 문제 자식이라 데리고 나온 아이의 속마음을 듣는 시간은 예외 없이 모든 부모가 눈물을 터뜨리는 하이라이트이고, 그전까지 여과 없이 보이는 일상 관찰의 한숨 터지는 부모들 모습은 영락없는 한량 스티브이다. 출연 부모가 자신의 눈가를 꾹꾹 내리찍어내듯, 나는 키친타월을 둘둘 풀어내며 코를 팽팽 풀어야 하는 감추고 싶었던 솔직함을 드러내야만 했다.


세상 귀찮은 건 전부 네 일이라며? 금쪽이와 금쪽이 부모의 모습을 보며 웃고 울던 중 갑자기 이 말이 떠올랐다. '네가 자식들에게 가르친 그대로만, 아니 그 반만이라도 너에게 적용해서 해 봐.' 하는 마음의 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내 귓등을 때렸다. 그래, 그러자, 한 달만이라도 그렇게 하자며 하나하나 챙기니 시간이 너무도 잘 간다. 대신에 내가 하고 싶은 건 내려놔야 한다. 내려놓아야 하는 건 다행히 먹고 싶고, 자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가 아니었다. (성욕은 여기서 다룰 주제가 아니니 나중에 풀자.)


이것저것을 제하고 나니 남는 것은 글쓰기연락하기 두 개다.


돌이켜 보면 이건 아내가 없어서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다. 싱글 생활에서 벗어나 둘이 되었을 때부터 내 시간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어쩌면, 집착이 아니라 결혼 후에도 자신이 싱글인 거 마냥 착각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이기적인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의 비디오를 되돌려 보니, 나는 10년도 훨씬 전 슬로바키아에서부터 아내가 아기 기저귀를 갈고, 침을 닦으며, 책을 읽어주다가, 시간 되면 밥을 짓고, 재료 손질해 반찬을 준비하며, 빨래는 널고 개는 동안에, 무심히 관찰자로만 있으면서 피아노 건반이나 뚱땅 거리며 스트레스 풀 시간 좀 가지고 싶다고 숱하게 징징댔다.




스페인에 와서 내 인생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날개 떨어진 추락은 단번에 산허리를 끊고 터널을 낼 만큼 폭발력을 지닌 다이너마트가 되어 나를 파괴했다. 그러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영어 강사를 시작하며 떨어진 날개는 다시 돋았고, 이후 가이드업은 하데스 Hades를 보기 직전까지 갔던 나를 올림포스 산 정상까지 올려줬다. 일상의 업이 만족이 되니 나만의 시간보다는 가족과의 시간을 잘 보내고 싶은 방향으로 자연스레 옮겨졌다.


코로나 기간 동안 어쩔 수 없이 천직인 가이드 업은 강제 휴무에 들어갔고, 그 사이 칼럼 글을 기고하던 게 계기가 되어 브런치에 입성했다. 문제는 글 쓰는 것도 유튜브를 위한 영상편집이나, 세상의 모든 매혹적인 건 다 보여주는 인스타나, 정보성 글을 위한 블로그 작업 못지않게 상당한 시간과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였다.


나만을 위한 공간과 시간, 나도 그래야 브런치 작가에서 진짜(?) 작가로 내 이름을 건 책도 내보고, 쉬는 동안 시간 허비하지 않고 알뜰하게 잘 썼다 할 것 아니겠냐며 아내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다. 간간히 내뱉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다 속시원히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포장은 그럴 듯 하지만, 결론은 그래서 집안일이고 애들 보는 일이고 간에 아이고 나는 모르겠다, 전부 당신이 다 맡아라가 될 게 빤했기 때문이다. 그건 남편인 나는 돈을 벌건 안 벌건 상관없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란다 하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거라고 밖에 해석이 안 될 일이었다. 극과 극을 달렸다.


세월의 힘인지, 현실을 자각해서인지, 난데없이 도전정신이 들어서인지, 솔직히 이유는 모르겠다. 아내가 없는 동안, 먹고 자는 기본 욕구를 제외한 다른 욕구를 잠시 제쳐두기로 했다. 나의 다른 욕심을 이루려 하니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재촉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글을 앞으로 영원히 안 쓴다는 것도 아니고, 한 달 반 동안 단 한 개의 글을 쓰지도 읽지도 않겠다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욕심을 앞세웠을까. (응, 너 관종이라서 그래. 아, 그래, 그렇구나. 고마워, 여기 정체성 하나 추가요)


이렇게도 생각해 본다. 물론 매일 꾸준히 쓰는 건 정말 좋은 습관이자 작가, 또는 작가 지망생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부단한 연습과 연마 없이 어떤 탁월한 역량과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살짝 뒤집어 본다면, 불과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글 한편 제대로 못 썼다고, 앞으로도 계속 못 쓸 사람이라면, 그냥 처음부터 아닌 거다.


그렇다고 그게 또 그렇게 절망할 일도 아니다. 다른 일을 찾아보면 되니까. 아니면, 힘들겠지만, 처음부터 다시 날아간 지푸라기 주워오고, 진흙과 모래, 자갈을 구해와 물 부으며 공구리 치면 그만이다. 귀찮고 좀 고되다 싶을 뿐 전혀 손도 못 댈 일은 아닌 것이다.




샤워 후 밤에 침대에 누워, 또는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막내에게 책 읽어주는 동안 아이도 나도 같이 스르륵 잠에 빠지는 마법에 걸리고 말았다. 보통은 세 권 정도인데, 아내가 없는 사이 막내는 당연한 듯 더 가져왔다. 두 권 정도 읽자 듀라셀 광고에 나오는 일반 건전지 토끼의 북치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처럼 말이 어눌해지기 시작한다. 밥하고, 반찬 차리고, 국 끓이고, 치우고, 청소, 걸레질, 공부 봐주고, 챙기고, 숨바꼭질하고, 그네 태우고, 시소 타고, 밀고, 뛰고, 놀고, 씻기고, 말리고, 빗기고, 바르고, 정리하는 걸 매일 하는 동안 한량주부의 배터리 칸은 빠르게 소모됐다.


남자인 나도 금방 방전되고 마는데 엄마인 그녀는, 그리고 다른 가정의 엄마들은 다들 대체 어떻게 감당을 해 온 것인가. 해석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었다. 사나흘, 아님 일주일은 폼나게 하고 오히려 인스타용 증빙사진에라도 올리면서 경험치도 쌓으면서, 가정적인 남편이다, 자상한 아빠다 라는 식의 남부러울 칭찬도 듣겠지만, 몇 년을 챙기고 보듬어야 할 엄마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가 없기에 엄마를 만들었다


전업주부, 워킹맘에 상관없이 엄마는 무조건 대단한 분들이다. 3주 차 체험에 우러나온 말이다. 나도 나의 어머니를 다시 본다. 이곳 브런치 작가님들을 다시 본다. 내가 아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분들. 아이가 하나이건 쌍둥이건, 다둥이건 간에. 브런치, 페이스북, 인스타, 유튜브, 블로그 뭐든 상관없이. 본문, 댓글, 답글, 하여간 가사에 육아만 아니라 뭔가를 읽고 적고 공감 버튼을 눌러가며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남기는 모든 엄마들은 정말 위대하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정말 대단하다.


기실 욕심을 버리면 된다는 명제는 사실, 나에게 해당되는 말일뿐이다. 본업 외에 사이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시간 활용과 재미,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보려는 아빠의 욕심이란 말이다. 그러나, 엄마와 어머니에게는 욕심이랄 게 없다. 요청이자 삶을 이어나갈 당연한 요구사항, 그도 아니라면 소박한 소원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전업주부로서 하루 종일이든 워킹맘으로서 퇴근 후 다음 날 출근까지의 시간이건 간에, 집에 오자마자 또 다른 본업을 시작하는 엄마를 두고, 그들의 요구이자 소원을 욕심이라 치부하고, 그러니 그것을 버리라는 건 무자비한 말이다. 그러니 오늘 글의 부제는 지극히 한량주부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사적인 것으로 이해해 주시길.


코로나 초기 락다운에 걸려 수개월간 집 밖을 못 나갔을 때도 이 정도로 갈망이 생기진 않았다. 내가 해야 될 것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열망 말이다. 그런데 불과 한 달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나는 백기를 들었다. '육아와 가사가 내 삶의 전부는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라고 나는 외친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십 년 이상을 해온 아내는? 앞으로 이십 년은 족히 더 해야 될 것 같은 상황에서 이 땅의 엄마는?




아내가 한국에 간 지 3주가 지났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매일 쓰려던 일기日記는 주기週記가 되었다. 세 자녀 아빠의 한 달 반 육아는 몇 번을 더 쓸 수 있을까. 다행이라면 아이들이 이번에 개학을 했다. 내가 조금만 더 바지런을 떤다면, 여섯 번이 아니라 열 번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양에서 질이 나오는 걸 무시할 수 없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라는 것을. 매번의 글쓰기는 진정한 작가가 되기 위한 연습이기도 하지만, 하나하나에 쏟은 진심은 습작과 걸작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주말 이틀을 보내면 다시 월요일이 찾아온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다. 세상에, 월요일이 기다려진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육아와 가사가 찾아 준 시간의 재발견이자 보상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