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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r 28. 2022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스페인 가이드 스티브입니다.

여행을 좋아했습니다. 아니, 좋아한다고 자기소개 취미 칸에 적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자신 있어할 만큼 많이 다녀보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밀렸습니다. 그래도 어렸을 적 아버지께선 가족들을 데리고 어딘가 다니기를 무척 좋아하셨어요. 주말이면 아버지께서 애지중지 아끼시던 스텔라 88을 타고 몇 시간씩 막히는 길에도 아랑곳 않고 산과 온천, 유적지를 찾아갔지요. 그곳에서 아버지의 카메라 셔터 세례를 받으며 어색한 미소를 띠던 게 앨범 속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어디를 가시건 누구와도 말을 잘 붙이셨습니다. 식당 아주머니, 가게 청년 점원, 목욕탕 이발소 아저씨, 등산 중에 만난 어르신 등 나이와 성을 가르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하시던 아버지의 기질은 고스란히 저에게 물렸습니다. 그래서 무척이나 내성적인 데다 수줍음을 타던 저였지만, 어떻게든 친해지고 싶고 친구이자 형, 누나, 동생으로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 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집돌이가 되어 하루 종일 집에만 콕 박혀 있어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친구한테 전화 걸고, DVD 보고, 클래식 CD를 들으며, 읽던 책 또 읽는 걸로 며칠을 보내도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지요. 한편, 일단 밖으로 나가면 진이 다 빠져 녹초가 되도록 발발 거리며 돌아다니는 것 역시 타고난 기질인 거 마냥 격하게 좋아했습니다. 집안 조상님 중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 김정호가 계시다는 사실이 집 안과 밖, 어디서건 즐기는 지금의 저를 설명해 주는 단서가 된다고 봐도 될까요.




집돌이인 동시에 역마살 끼듯 살던 저는 졸업 후 해외로 나와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스페인에서 현지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고, 마침내 천직인 가이드의 길로 접어들어 아예 여행을 업으로 삼았습니다. 일정을 점검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땐 철두철미한 계획과 매의 눈을 가진 직장인이 됩니다. 여행객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본업에서는 마이크 잡은 강사이자 거리의 인문학자가 되어 역량을 발휘합니다. 어떤 경험이든 버릴 게 없다는 걸 일할 때마다 실감합니다.


여행을 업으로 삼으니 같은 장소를 수십 번 이상 가는 게 기본입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지리며 언어, 풍습 모든 것에서 다른 세 나라를 넘나 듭니다. 갈 때마다 멋진 풍경,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건물, 그 안의 귀한 유산과 작품들, 그 어느 것도 이젠 그리 생소할 게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아무런 감흥과 감동이 없을 수도 있지요. 가이드에게 익숙함이란 노련함이자 슬럼프의 양날 검과도 같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은 때면 언제나 사람을 봅니다. 사실, 매번 갈 때마다 즐겁고 신나는 건 다름 아닌 <사람> 덕분입니다. 늘 새롭거든요. 손님들 대부분은 인생의 선배가 됩니다.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따르고 싶은 어니스트, 아니 스티브의 큰 바위 얼굴이 되는 분들입니다. 그분들과의 만남이 귀한 인연으로 이어지고, 서로의 인생을 풍요롭게 합니다. 


언제나 사람 때문에 힘들고, 사람 덕에 힘을 얻습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얻는 사실입니다. 일의 시작과 마침이 노트북이나 휴대폰에 있지 않고 사람에 있습니다. 여행이 일인 저에게는 만나는 사람이야 말로 생생히 살아있는 여행책자이자 인생 가이드 북이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배울 거리가 가득하고 나눌 이야기가 풍성합니다. 

 




얼마 전 오래 알고 지낸 친구 같은 동생이 일행과 독일에서 찾아왔습니다. 그전에 마음에 힘든 일이 있었는데, 유쾌하고 에너지 넘치는 동생 덕에 깨끗하게 치유가 되었습니다. 맷돌에 눌리듯 갑갑하고 답답했던 속이 까스 활명x를 들이켠 것 마냥 개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살면서 처음 본 발렌시아의 세계적인 축제, 라스 파야스 Las Fallas의 전야제 행사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먹는 게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구글 지도 별점으로 강력 추천을 받은 따빠스며 해산물 가득한 원조 빠에야 맛집 때문만도 아닐 겁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남들 다 보고 가는 가우디의 걸출한 작품을 보여줘서도 아닙니다. 너무도 만나고 싶었고 사랑하던 동생과 여행을 갔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저는 행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지구 온난화를 주제로 한 발렌시아 라스 파야스 축제의 Ninot (목제 인형)

여행에는 단계가 있다고들 합니다. 먼저는 신이 만든 웅대한 자연을 보는 겁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광대한 자연의 풍광 속에 미약한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보고 깨우치는 게 여행의 출발입니다. 신의 손길이 빚은 걸 본 다음은 인간의 노력이 낳은 작품을 보는 일입니다. 왕궁, 성당, 대학, 사원 등 건축물을 비롯해 미술관, 극장, 공연장에서 예술 작품을 관람하며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일이지요. 마지막으로,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빚은 또 다른 나, 현지인과 조우하는 겁니다. 이건 관광지만을 돌아다녀 보는 걸로는 체득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처음엔 모두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고 나면 결국 모두가 같다는 걸 깨닫습니다. (참고로, "모두 같고 모두 다르다"라는 구호는 스페인 유니세프 기구를 비롯한 여러 인권단체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살아온 환경에 따라 다르게 표출되는 것일 뿐, 인간은 모두가 존중받아야 할 귀중한 생명이고, 나와 같이 희로애락을 지닌 형제이자 자매임을 알게 됩니다. 에어비앤비가 대박을 낸 것도 다름 아닌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해외에 살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는 한 누구도 내게 다가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과의 만남에 적극적인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에 감사합니다. 여행이 업인 저에게 가장 큰 놀라움과 감동은 위대한 건축물도 자연의 풍광도 아닌 바로 사람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코로나로 2년여의 시간 동안 이전만큼 여가로써 여행을 못 갔고, 일로도 여행을 많이 못했습니다. 그만큼 사람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덜 가진 셈이지요. 다행히 줌, 구글 미팅, 영상 통화 등의 기술 덕에 랜선 투어도 이루어지고, 오히려 시공간을 뛰어넘는 건수는 이전보다 비할 수 없이 많아졌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차를 타고 떠나거나, 열차와 비행기에 오르내리는 여행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건, 단순히 놀러 간다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홀로 낯선 곳을 떠나는 여행도 궁극에 있어서는 내가 모르던 '나'를 만나고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물며 누군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의 의미는 얼마나 클까요.




스페인에서는 해마다 1월이면 가장 먼저 세계여행 박람회부터 엽니다. 공부, 다이어트 등에 새해 결심을 다짐하는 우리와는 정말 다른 모습이지요. 사람들이 여행으로 먹고사는 게 다여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굳이 스페인 자국인들에게 '세계' 여행 박람회를 필요가 없겠지요.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에게 여행이란 단순히 여가나 취미 중 하나로 보는 게 아니라는 걸 반증합니다. 심지어 근면과 성실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입장에서 여행은 한때 '놀음'으로 여겨지기도 했지요. 오죽하면 휴가마저 가서 무엇을 하며 보낼 건지 사전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웃기지도 않은 일이 생겼을까요. 유럽인에게 여행이란 인생의 본질을 채울 필수 요소로 인식한다는 걸 박람회 행사를 통해 보여주는 겁니다. 다채로운 면을 보고 인식의 폭을 넓히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이지요. 삶을 바라보는 셋팅부터가 다르다고 볼 수밖에요.


여행은 걸어 다니는 독서이자 생생한 체험학습현장이 됩니다. 역사유적을 돌아보더라도 결국 남는 것은 그 후손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식당과 거리 등에서 만난 현지인이 내게 어떤 인상을 남겨 주었는가가 될 겁니다. 하여 진정한 여행이란 남들이 가보지 못한 곳에서 인생샷을 건져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실은 다니는 중에도,심지어 다녀온 이후에도 이전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일상을 새롭게 볼 '눈'을 가지는 일에 달려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요. 한편, 새로운 눈을 가지는 가장 손쉬운 일은 다름아닌 '글쓰기'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근 두 달에 가까운 공백 기간 후 처음으로 남기는 글이라 제목부터 크게 인사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쓰고 보니 이렇게 말씀드려야 더 맞을 것 같네요 :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로 말이죠.


글의 제목처럼 반가움에 달려가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 글을 읽으시는 문우님들께, 거기에 덧붙여 라이킷도 눌러주시고, 심지어 댓글까지 남겨주시는 벗님들 한분 한분과 말이지요. 미소 가득한 따스한 얼굴로 스페인에서 마주할 날이 곧 오기를 바라며, 이상 여러분의 스페인 가이드 스티브였습니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 여행 >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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