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에서부터 알고 지내온 친한 형님의 소개로 개인 가이드를 하러 바르셀로나에 다녀왔습니다. 바르셀로나는 그곳을 스페인의 수도로 아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스페인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입니다. 물론, 마드리드에 사는 저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때마다 부러움에 사로잡히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물가가 싼 편에 속하지만, 바르셀로나는 다릅니다. 부자는 그냥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바르셀로나를 다녀보면 알게 됩니다. 디테일한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자신의 수고가 깃들인 만큼 그 이상의 값을 매겨 세상엔 절대 공짜가 없다는 걸 깨닫게 합니다. 처음에 멋 모르고 볼 때는 도시 곳곳의 아기자기함에 반하지만, 이내 그 모든 것이 내 지갑의 신용카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그런 바르셀로나에서 본인들이 묵는 5성 호텔에 제 객실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호텔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의 영웅 황영조 선수가 뛰며 들어온 몬주익 언덕에 위치해 있습니다. 객실의 채광은 더없이 훌륭합니다. 발코니에 나와 보니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성가족 성당은 물론,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거기에 지중해까지 보이니 감탄과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5성 호텔이라 그런 건지 바르셀로나 사람이라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한국인(동양인) 손님을 응대하는 호텔 리셉션 직원 태도에 약간의 콧대 높음이 느껴집니다. 눈과 눈을 마주하고 '네' 보다는 '아니오'를 더 당당하게 말하는 그들의 대응에 살짝 놀라기도 합니다.
고객은 고객일 뿐, (당연히) 왕이 아닙니다. 어떤 서비스가 필요해 찾아온 사람일 뿐입니다. 당신과 나는 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는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지, 누가 누구 위 또는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는 그들의 사고가 눈빛과 손발의 제스처, 그리고 그들의 말투에서 그대로 묻어납니다.
리셉션에서 고개를 살짝 올려다보니 북까페 분위기의 로비 바 lobby bar에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있습니다. 해서 물어봅니다. 저기 피아노가 있는데 쳐 봐도 되나요? 어떤 답이 돌아올까요?
ㅡ리셉션: 저 피아노는 저희 전속 연주자가 주말에만 연주합니다. 피아노를 어느 정도 치나요?
ㅡ스티브: 교회 피아니스트입니다.
ㅡ리셉션: 잘 친다는 얘기인가요?
ㅡ스티브: 네. (단답형이 포인트입니다. 우물쭈물 또는 겸손하게 답하면, 바로 쿨하게 거절당합니다. 그냥 친다, 못 친다, 잘 친다, 망설일 것 없이 사무적으로 얘기해야 됩니다.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못 치더라도 어느 정도 수준으로 친다고 뻥카를 날릴 필요도 있어요.)
ㅡ리셉션: 그럼 뭐...
ㅡ스티브: 아, 그러면 제가 일단 한 곡 쳐 볼 테니 들어보고, 된다 안 된다 신호를 보내주세요.
ㅡ리셉션: 그러시죠. 들어보고, 괜찮으면 계약 건의하겠습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ㅡ스티브: 아닙니다. 전 마드리드 살거든요. (단호박)
직원과 손님 간의 농반진반, 놀람이 될지 까임이 될지 모르는 묘한 기류 속에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꼭 이럴 때는 스티브 저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보다는, 한국인, 더 나아가 아시아인을 대표하는 듯한 오지랖이 발작을 합니다. '두고 봐, 콧대를 눌러 주고 말겠어!' 이런 오기가 생긴다 이 말이죠.
이럴 때는 빠르거나 복잡한 곡을 쳐서는 안 됩니다. 일단은 제가 그럴 능력이 안 되는 것도 있지만, 릴랙스 하며 편하게 들어야 할 곳에서, 갑자기 머리를 싸매고 미간에 내 천 자를 긋게 만드는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도 있거든요.
하여 아내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의 2악장 아다지오 칸타빌레를 연주해 보았습니다.
지나가던 손님들이 신기하게 쳐다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들어 봅니다. 채광 좋은 로비에서 지중해의 낭만을 머금고 노래하듯 천천히 연주하는 선율 속에 기분이 확 풀어집니다. 엄마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무릎 위에서 박자를 맞춥니다. 불과 몇 분만에 비즈니스로 바삐 응대하고 딱딱하게 말이 오가던 공간은 따스함이 깃들고 낭만적인 장소가 됩니다.
연주하는 위치에서 리셉션 직원의 표정을 살펴봅니다. 눈이 마주치니 씨익 웃으며 눈 찡긋 윙크를 보냅니다. 기분 좋게 엄지도 하나 올려줍니다. 200년도 더 전에 베토벤이 고뇌하며 남긴 악보 덕분에, 평범한 한국인 아재는 스페인 사람들이 두 번 쳐다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깍쟁이로만 느껴지던 바르셀로나가 인간미 있는 곳으로 다가옵니다. 클래식 음악이 선사하는 부드러운 힘에 이끌려 다음 날은 또 다른 곡으로 공감을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