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un 07. 2022

건반을 두드리며

나만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피아노는 나의 오랜 친구다. 어렸을 적 꿈이 피아니스트가 될 정도로 피아노를 좋아했다. 학원 순례를 다니던 중에도 피아노만큼은 중간에 끊지 않고 꾸준히 이어가기도 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내성적이기까지 했던 10대. 피아노만큼 잠재된 무언가를 여한 없이 발산시켜 주는 건 없었다. 맞든 틀리든 그건 문제가 아니다. 잘하든 못하든 역시 부차적인 일이다. 여든여덟 개의 건반은 오롯이 연주자만의 세상이기에 괜찮다.


일기장의 글도 마음의 소리를 옮겨 담기는 하나 전반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때의 글을 다시 읽는 일은 생각보다 드물었다. 이런 경향은 지금도 그렇다. 댓글이 달리면 어떤 점이 독자의 마음을 끌었을까 생각하며 스스로도 다시 글을 읽으며 짚어 보지만, 딱히 반응이 없는 글은 그때 쓴 것으로 만족하고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피아노는 다르다. 친 곡을 두서너번 다시 치는 건 일도 아니다. 십 년, 이십 년이 넘도록 반복해서 쳐도 여전히 좋다. 이삼십 년 전에 치던 곡을 다시 친다는 건 묵은지를 담는 과정이고, 각종 된장, 고추장, 간장을 제대로 발효하는 기간이며, 세상에 하나뿐인 와인을 숙성시키는 신성한 과정이다. 악보 속 기호를 찾을 일도 없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음표들은 손가락이 먼저 알아서 간다. 이성적인 데이터 분석보다 감각과 느낌에 보다 충실하니 누가 뭐라 해도 이 시간의 주인공은 내가 된다.

안타깝게도 어렸을 때 친 종이 악보는 대부분 버려졌다. 이런 날을 생각지 못하고 미처 챙겨두지 않은 내 잘못이다. 새 악보 진도를 나갈 때마다 원장님은 크게 날짜를 적으셨다.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가 가상 화면을 띄워서 이리저리 둘러보듯 신기하게도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체르니 시리즈, 소나티네, 소나타, 하농 등 당시의 종이 악보 표지는 물론 1번 곡 위에 큼지막하게 서명하든 남긴 날짜들. 그때의 손때 묻은 악보가 남아 있다면, 당시의 어린 나와 같은 아이들에게 집에서 피아노를 가르쳐 주는 지금, 그 감회는 말로 다 못할 일일 것이다. 낱장의 인쇄물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배우고 익혀 즐기면 그만이지.


국민학생 시절 즐겁게 피아노를 배워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던 그 아이는 중학생 때 감정이 바싹 마른 선생님에게 메트로놈의 박자 강박과 빠르기를 따라가기에 급급해지면서 미소를 잃어갔다. 건반만 봐도 무서움이 일고, 악보만 봐도 숨이 막힐 것만 지경까지 이르렀다. 예술계로 진로를 확정한 것도 아니고, 전공자가 될 건 더더욱 아닌데 굳이 끙끙대며 이어갈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얼음공주 음대생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

훗날 시골 할아버지 댁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피아노 건반만의 소리. 무슨 곡이 저세상의 음울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선보이고, 단 한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몰아가면서도 그래도 숨은 한번 쉬고 가라는 식으로 쥐락놔락 하는 것인가. 알고 보니 그렇게나 치기 싫었던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 1악장이었다니. 갑자기 바둑판 복기라도 하듯 깨알 같은 음표들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오선지에서 튀어나와 사정없이 귓가를 두드리며 하는 말, '들어봐, 이게 이렇게나 엄청난 곡이었어, 몰랐지?'

30년 전 우연히 들은 라디오 클래식의 아찔했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충격에 휩싸이고 창피함에 어쩔 줄 몰랐던 사춘기 소년은 능구렁이 사십춘기 아재가 되었다. 가냘프게만 보이던 손가락은 거죽 사이로 정맥이 푸릇푸릇하다. 무심한 세월은 손가락 마디마다 주름을 선사했고, 주름은 경험과 연륜이라는 자식을 낳았다.

지식이 머무는 기간은 짧아지지만 지혜가 남기는 해석은 깊어지기에 건반을 두드릴 때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인생의 고난은 옅은 한숨의 메조 피아노가 되고, 삶의 희열은 포르티시모의 강렬한 터치로 되살아난다. 건반을 두드릴 때마다 번잡했던 외부와 잠시 끊고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나에게 에너지를 집중하는 시간. 내 감정에 충실해지는 시간. 변하는 세상에서 변함없는 친구인 건반과 함께 하는 시간이다.



(배경 사진: unsplash Dolo Iglesias)

매거진의 이전글 음악이 만드는 분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