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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un 22. 2022

정신줄 놓게 만드는 스페인 더위

시에스타는 생존수단 입니다

여름은 더운 게 정상이다. 그래야 강과 산으로 바다로 놀러 갈 기분이 난다. 그늘 아래에 자리 잡고 시원하게 그냥 널브러져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고, 시원한 수박 한 덩이면 무릉도원 부럽잖으며, 줄줄 녹아 흐르기 전 야무지게 한입 덥석 물다 그만 머리가 아찔해지는 빙과조차 더위를 잊게 해 주니 좋기만 하다.


그렇지만 스페인의 여름은 그냥 덥다 라는 말 만으로는 부족하다. 타 죽을 정도로 뜨겁다. 7, 8월에 35도는 애교다. 40도는 되어야 이거야 말로 여름이지 싶다. 헌데 올해는 6월 중순부터 40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거리는 대형 건식 사우나가 되었고, 골목 곳곳은 집에 있는 히터와 모닥불을 전부 끄집어 내놓은 거 마냥 화륵화륵 있는 대로 열기를 내뿜는다. 아무리 남녀노소 말하기를 좋아하는 스페인 사람들이고 수다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량이라 해도 40도를 웃도는 불볕더위는 쉬이 지치게 만든다. 참고로, 비행기로 한 시간 반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포르투갈은 무려 7~8도나 낮으니 신기할 뿐이다.


에어컨은 이런 때 위해서 있는 게 아니냐 싶지만, 코로나 사태 때부터 최저와 최고 사이에 2배 가까운 차등 요금제를 실시하는 스페인 거주자 입장에서 담대하게 에어컨을 켤 사람은 흔치 않다. 경기에 상관없이 다달이 급여를 받는 직장인이라 해도 일단 냉수부터 들이켜고 볼 일이다. 직장인이 직장에 있을 때, 여행자가 객실에 있을 때만이 당당하게 에어컨의 리모트를 당장에 최저 온도로 맞추며 여름을 날 수 있다.




우리에게 시에스타는 스페인과 중남미를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단어이자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혀 있다. 하나의 풍습보다는 근면 성실한 우리와는 다른 게으름의 상징으로, 그래서 이들이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 치부되는, 약간은 경멸과 무시의 뉘앙스마저 풍기는 말이기도 하다.


심지어 진짜로 21세기이 시대에 아직도 시에스타를 지키냐며 도저히 말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쾌적한 사무실에선 굳이 시에스타를 가질 필요가 없지만, 토양 위에 비지 흘려야 하는 입장에선 시에스타 없이 일만 한다는 건 자살행위와 다를 바 없다.


시에스타는 게으름과 농땡이를 피우기 위한 게 아니라 철저히 이들의 생존을 위해 자연적으로 생겨나고 정착된 이들의 문화이다. 오전 10시만 해도 바로 30도가 되고, 이후로 쭉쭉 올라가서 오후 4시, 5시에 40도까지 다다르는 이들의 환경에서 시에스타는 하루를 두 번 살아가게 해주는 고마운 휴식시간이다. 땡볕, 불볕, 폭염에서 건강히 살아남게 하고, 인생을 100m 단거리가 아닌 풀코스 마라톤으로 보고 달리게 하는 안목이다. 궁극에 가서는 혼미해지기 쉬운 정신줄을 놓치지 않고 버티게 하는 지혜이다.


적절한 긴장은 활력을 준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내 삶에서 그 '적절한 긴장'을 과연 얼마나 경험해 봤는지 기억이 없다. 그냥 까라면 까는 거였으니까. '덜' 이란 건 없고 오직 '더! 더! 더!'를 외치는 억압된 풍요 속에서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버텨내야 했다. 정신줄을 놓지 말라는 건 이기고 지는 게임 한 판의 가벼움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전쟁터의 나팔 신호였다.


정신줄을 무조건 붙잡고만 있는다면 그건 처음부터 그냥 묶여 있는 거다. 그건 손으로 붙잡을 줄이 아니라 노예 발목의 사슬이자 죄수의 차꼬일 따름이다. 놓는 게 있어야 잡는다는 개념이 살고, 넘어져야 다시 일어나는 주인공이 멋져 보이는 법이다. 있어 보이려고 하는게 아니다. 정신승리를 위한 말은 더욱 아니다. 살아보니 그렇다는 걸 이제사 체험한다.


너무 일찍 뜨거워진 스페인의 6월 덕분에 매일 놓치고 붙잡으며, 놔줬다 다시 쥐는 힘든 일상을 살아간다.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간이지만 그래도 묵묵히 걷는다. 미치도록 뜨거운 지금 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한풀 꺾이고 지나갈 테니까. 몸은 견디기 힘들지만 삶의 지혜를 조금은 일찍 깨우쳐 준 스페인의 태양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 정신줄 >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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