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
대략 7년 전, 한 선배의 소개로 스페인에서 은행 계좌를 새로 열었다. 네덜란드계 금융회사인 ING 은행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ING 은행은 본인들의 상품 영업을 입소문 마케팅을 이용해 손님을 끌어들였다. 기존 ING 고객이 신규 고객을 소개해 급여 통장을 개설하면 양측에 각각 50유로, 우리 돈으로 약 66,000원 정도를 꽂아주었다. 프로그램 이름도 말 그대로 BROKER 중개인이었다. 그렇다고 피라미드는 아니니 안심하시길.
현재도 여전히 운영 중이지만, 코로나를 겪고 나서는 10유로가 깎였다. 그래도 그게 공돈으로 40유로, 5만 원 신사임당이 떡하니 생기는데 그게 어디냐 싶다. 물론 이보다 더한 프로모션을 거는 스페인 기반의 은행들도 있다. 월급통장을 개설만 하면 LG TV며 삼성 휴대폰을 줄 정도로 제법 크게 한다. 그것도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게 아닌 매년 연례행사로 B2B 계약을 체결해 서로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승부수를 띄운다.
코로나 기간을 거치며 대부분의 경제적 지표에서 우리나라보다 확실히 아래에 위치한 스페인은 자칫 우리가 볼 때 그저 못 산다고 치부하기에는 의외로 세계적인 기업들이 제법 있다. 특히 서비스 업계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의 규모를 가진 세계적인 기업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금융계에서는 산탄데르 SANTADER 은행, BBVA 은행 (빌바오 비스카야 아르헨타리아 은행, BANCO BILBAO VIZCAYA ARGENTARIA, 스페인에선 알파벳 그대로 베.베.우베.아.라고 읽는다) 등으로 유럽은 물론 글로벌 순위에서도 단연 손에 꼽히는 은행들이다.
세계에서도 5위 안에 드는 무시무시한 규모의 은행이 자리 잡은 스페인에 국제 네덜란드 그룹(ING라는 이름 자체가 Indternationale Nederlanden Groep의 두문자로, 영어로 말하면 International Netherlands Group이다)이 파고드는 방법은 기존 고객이 알아서 홍보하고 브로커로 뛰게 만드는 소개비 지원과 같은 실질적인 면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감성적으로도 일가견이 있는 거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족 마케팅을 기반으로 한 문구가 넘쳐난다. 대표적인 예로 대가족이 나와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와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슬로건으로 마무리 짓는 옛 광고를 떠올려 보자. 한 때 대기업에 몸 담았던 1인으로써 해당 문구는 가식과 기만 그 자체라 너무도 역겨워 지금이라도 토가 나올 거 같고, 몸서리가 쳐지지만, 그건 그저 어쩌다(?) 상사를 잘못 만난 지극히 사소한 개인 경험으로 치부될 뿐이다. 그 광고는 해당 기업을 세상에서 더없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따뜻한 회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가족? 가족이면 다 덮어놓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갈 수 있을까? 그래, 실제 사무실에서는 반 협박에 가까운 험한 말은 기본이고, 인격 모독의 발언조차 서로 다 잘 되자고 건넨 격려라는 어불성설도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는 게 당시로선 일상이었다는 사실은, 그저 다 지난 일이니 조용히 넘어가야 할 일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깨달은 건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게 네 가족이라고는 안 했다'라는 쓰디쓴 헛헛함만 남을 뿐이다.
그 기업과 오랜 경쟁 구도에 있는 또 다른 회사의 마케팅 문구는 어떠했나. 학교, 직장 등이 나오지만 사실상 가족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별 다르지 않다. 욘사마의 치아가 눈부시도록 환한 미소가 감돌며 나오는 삼세 번 연속해서 나오는 멜로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ㅇㅇ'. 그냥 멜로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효과. 뚜렷한 포지셔닝도 없고, 양산 제품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추상적인 이미지 그 자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광고는 해당 기업의 역대 최고 홍보 성공 사례로 남는다. 내 생각과 남들의 생각은 정말 달라고 너무 다르구나 라는 걸 절실히 깨우치게 한 위대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이니 사랑이니, 실상은 그들과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나는 괜찮아, 그 회사는 좋아, 이 제품이 최고야 하는 허구의 이미지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맞다, 내가 너무 꼬였다. 그만하자.
다시 오늘의 주제인 은행 카드의 문구로 돌아와야겠다. 카드가 든 우편 봉투를 집에서 받고 개봉하던 그날, 난 문자 그대로 보자마자 살짝 실성한 사람 마냥 빵 하고 터지면서 동시에 눈물이 순간 핑 돌고 말았다.
세상 모든 재화 중의 최고라 할 수 있는 황금빛이 감도는 배경 색상에, 근엄하기 그지없는 사자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고, 그 가운데 성경 구절이랄지 노래 가사랄지 시구 일지 모를 감성 터지는 말이 있잖은가.
CONTIGO AL FIN DEL MUNDO
WITH YOU TO THE END OF THE WORLD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꼰띠고 알 핀 델 문도... ING 은행 스페인 지점과 개인적으로 확인은 안 했지만, 해당 구절을 마케팅으로 사용한 분은 필시 기독교계 인사일 것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영미권과 우리나라에서 발급하는 ING 신용카드 이미지를 검색해 봤다. 그냥 오렌지 색(오렌지 색은 네덜란드의 상징임), 검은색, 회색, 금색 등의 카드만 있을 뿐 거기에 당신과 '함께 한다'는 문구는 없었다. 21세기 자본주의 속에 살아가지만 그래도 전통적으로 카톨릭계의 나라인 스페인이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참고로, 마태복음 28장 20절 후반부를 보면 이렇게 나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해당 구절의 스페인어는 다음과 같다:
y he aquí yo estoy con vosotros todos los días, hasta el fin del mundo.
(음가: 이 에 아끼 요 에스또이 꼰 보소뜨로스 또도스 로스 디아스, 아스따 엘 핀 델 문도)
하긴 그대와 함께 하겠다는 말이 꼭 성경에서만 나오라는 법은 없을 거다. 연애할 때만 해도 얼마나 많이 고백하는 말인가. 발라드 노래에선 너무 흔해서 상투적이기까지 한 말이 된 지 오래인데. 이내 혼자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그래도 나름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거 마냥 아내에게 호들갑을 떨며 이것 좀 보라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지? 하며 신기한 듯 웃었다.
하지만 그냥 웃고만 지나가기에 내 삶이 너무도 힘들었는가 보다. 7년 전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더 힘들다. 살짝 미치기 직전까지만, 정신줄을 놓을까 말까 하는 경계에서 상황이 자꾸만 조여 온다. 이래도 버티겠어? 아직도 견딜 수 있다고? 정말?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건데? 깐족거림인지 테스트인지 시험인지 분간조차 못할 상황.
10년 전 처음 스페인에 왔을 때 정말 죽음의 문턱까지 갈 정도로 직장 내 언어폭력에 시달리며 대인기피, 우울증, 공황장애, 트라우마를 종합세트로 떠안으며 마침내 귀국행 티켓을 끊고 돌아가려 했다. 그러다 알 수 없는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며 따랐던 그 기억 - 네가 여기 남고자 하면 내가 먹고살아갈 일은 책임져 주마. (이 무슨 일이고 대체?)
남들에게 얘기해 봐야 '별 미친 소리 다 듣겠네,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하더니 드디어 갈 때까지 갔구나.' 하는 비아냥 내지는 겉으로는 내색 못해도 속으로는 '안 그래도 어딘가 좀 특이하다 싶었는데, 역시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어, 이제라도 멀리하자.' 라며 수군거릴 뒷담화거리밖에 안 될 너무도 사적인 경험담이기에 당시에는 아내와만 은밀히 나누었다.
그때의 일이 나를 지금까지 이곳에 있게 만든 것인데, 앞으로 어찌해야 할까. 무수한 나뭇잎과 잔가지에 둘러싸여 항상 어디선가 소리는 들리지만 막상 찾아내기는 어려운 blackbird처럼 여전히 막막한 길을 걷고 있다.
오랜만에 카드를 꺼내 들어 결제를 한 건 했다. 매번 부딪히는 온갖 사건 변호에 끙끙 앓던 우영우 변호사에게 해결사 고래가 등장한다. 주파수 소리를 내는 고래가 퍼뜩 일 때면 우 변호사의 동공이 커지고 머릿결이 찰랑거리며 해결책의 영감을 찾아내듯,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고 나니 여전히 반짝이는 금빛과 편안함을 안겨주는 Rockwell 영문서체가 카드를 처음 영접했을 때의 생생한 감동으로 눈에 들어온다.
네가 있어 버틴다.
당신이 있어 견딘다.
그대가 있기에 살아간다.
내 곁에 함께 한다 했으니까.
세상 끝까지 함께 해 준다고 했으니까.
든든함에 고맙고, 힘을 얻고, 우직하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배경사진: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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