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하고 싶었던 유교 보이
모범생이었다. 아, 쓰면서도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드네. 그저 공부만 하는 애였다. 와, 진짜 별로 구만.
성격은 이런 말 쓰면 요즘 양성평등에 어긋나는 말이지만, 그냥 그때는 그렇게 표현했다: 기집애 같은 놈. (맞춤법상 계집애가 맞지만 다들 기집애라고 불렀다)
게다가 취미는 축구, 농구가 아닌 피아노.. 같은 소리나 하고 있으니 인기가 없는 건 당연했다. 한마디로 쫌 재수 없는 은따 범생.
국민학생 때 거의 모든 애들이 다 보고 웃던 '봉숭아 학당'의 맹구니 오서방이니 하는 캐릭터에도 딱히 반응이 없고, 오히려 과장된 그들의 연기가 싫어 안 보기까지 했다. 음악을 들어도 배우고 있는 피아노가 좋아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으니, 한사코 클래식만 듣겠다며 가요는 한 곡도 안 들었다.
바른생활 책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으면 안 된다고 나와 있었다. 하여 길거리의 떡볶이며 오뎅을 사 먹은 게 고2인지 고3인지였는데, 정확한 연도는 기억 안 나지만, 친구 덕분에 태어나 처음 먹어보던 그날 오뎅 맛에 대한 충격과 전율은 실로 대단했다. 그렇게까지 늦게 입문한 건 딱히 고집이나 오기가 아니라 책에서 배운 대로, 정말 그냥 멍청하게 바보같이 그래야 되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길거리 음식의 신세계를 열어준 친구 가라사대, 길거리 오뎅은 먹을 때 간장 자체 보다도 간장 양념통 속의 파를 올려 먹어야 제맛이라 했다. 지금으로 치면 그게 국룰이라 하겠다. 이미 한입 베어 문 사각 오뎅 끝에 튀어나온 뜨개질 큰바늘 같은 굵은 꼬치를 재주도 좋게 송송 썬 파 조각을 얹어 맛보라 했던 그 순간!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의 주인공 쥐 레미가 치즈와 과일을 한 번에 같이 먹을 때 머릿속에서 터지는 불꽃놀이 장면 그대로 오뎅, 간장, 참깨, 파의 향연은 폭죽이 되어 날아다녔다. 거기에 후후 하며 불어마시는 손 데일 듯 뜨거운 종이컵 속 오뎅 국물은 온전한 합일을 이루었다.
88 올림픽 기념 호돌이 공책을 펼치면 뒷면에 삼강오륜이 궁서체로 적혀 있었다. 친구에 목마른 터라 눈을 붙잡은 건 朋友有信 붕우유신이었다. 훗날 30독 넘게 읽은 성경에서도 유독 좋아하는 말씀은 요한복음 15장 13절이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공책 속 삼강오륜, 이야기로 읽는 명심보감, 만화로 읽는 사서삼경. 국민학생 시절 제일 애착이 가던 것들이다.
이렇게나 훌륭한 선현의 말씀을 제목만 알 뿐 수업시간에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에 탄식하고, 기본 윤리가 무너져 자극적인 소식으로 가득한 늬우스는 물론 거리에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는 손길, 아무데나 내던지는 담배꽁초, 여기저기 뱉어대는 가래와 침을 보며 개탄하듯 혀를 끌끌 차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국민학생은, 좋게 보면 착하고 순수하지만, 달리 보면 문자 그대로 애늙은이 자체였다.
이런 국민학생 때의 모습은 어찌 보면 혼자 잘난 척하는 거 마냥 대단히 튀어 보일 수 있겠지만, 그때 그 학생은 그저 수업시간에 배운 대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정해놓은 규칙대로 살고 싶었고, 어른들 말씀 잘 들으며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튀는 게 싫어서 그런 건데 오히려 결과는 반대였다. (계속)
아래 채널에서 편하게 얘기 나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