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Sep 16. 2022

말 안 통하는 앵무새를 키우면

엥, 앵무새면 다 말하는 거 아니었어요?


재작년 겨울 이웃에게 앵무새를 한 마리 받았다. 그분 역시 누군가에게 앵무새를 받았는데 (성별을 안 물어본 채 키워서 지금껏 아무도 모른다), 아이들이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 하여 고양이를 들여와 보니, 아무래도 위험할 듯싶어 전해받은 게 우리 식구와의 첫 만남이었다.


붉은모란앵무, 또는 낭만 가득한 이름인 lovebird러브버드 종의 수명은 대략 10년에서 15년이라 한다. 받았을 땐 이미 9살이 넘었다. 그걸 안 순간 머릿속에선 '키울 때야 좋지만 떠날 때는 어떻게 감당해야 하지?' 쓸데없는 오지랖 덕에 에너지 가득한 생명체가 전하는 행복의 향기를 코 앞에 두고도 맡질 못 했다. 발동 걸린 오지랖은 '인간의 나이로 치면 집안 누구보다도 어르신인데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나?' 하는 망상마저 끌어들였다. 옹翁일지 여사일지 모를 어르신 새에게 손주뻘 아이들은 부리가 예쁘다며 부리라는 뜻의 스페인어, 삐꼬 Pico로 이름을 붙여드렸다. 


삐꼬는 그저 보기만 해도 예쁘다. 선명한 빨간 부리부터 시작해 싱그런 녹색의 꽁지깃까지. 삐꼬의 몸은 미술시간에 배운 색상표를 펼쳐놓은 것처럼 곱고 화사해 보고만 있어도 눈이 즐겁다. 크기는 아이들의 한 손에 쥐어질 만큼 작디작다. 평소엔 거침없이 큰 소리를 질러대지만, 낮잠 자기 전에는 조곤조곤 거리며 골골 대는 반전 매력의 소유자다. 어르신의 오수를 방해하면 안 되건만, 가지 위에서 꾸벅꾸벅 조는 걸 보면 자꾸만 깨우고 싶다. (물론 그랬다간 애들에게 대번에 혼난다.) 


신나게 이름을 불러 재끼다가도 갑자기 생각났는지 "아, 맞다, 삐꼬 나이 많댔지." 하며 자제하는 녀석들. 때마다 모이 주면서 "밥 많이 먹어야 돼", 물 갈아 주면서 "많이 마셔야 돼", 선풍기 틀어주면서 "시원하지?" 이러니, 대체 누가 어른이고 아이인지 모르겠다. 누가 뭐라 하든 삐꼬 어르신은 그저 까독까독 거리며 단단한 씨 껍질을 쉴 새 없이 까고 또 깐다.


강아지처럼 미친 듯 꼬리 치는 것도 아니고, 고양이처럼 의뭉스럽게 슬그머니 다가오는 것도 아닌, 볼 때마다 황급히 퍼덕거리며 이리저리 도망치는 삐꼬. 그런데도 먹을 걸 주려 하면 손가락을 부리로 쪼기 일쑤다. 하긴 내가 삐꼬라 해도 자기 몸보다 수백 배나 되는 퀴클롭스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그냥 얌전히만 있지는 않을 거 같다. 


당최 알아먹을 소리라곤 하나 없는데,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알 수나 있겠나. 거인 입장에서야 밥 주려고 손가락 내미는 거라지만, 본인 입장에선 전봇대 끝에 강냉이 꽂아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건데. 저런 걸 그냥 둬서는 안 되지, 암만. 유일한 무기인 부리로 사정없이 찍어야지, 그럼, 그렇고 말고.


삐꼬는 열어둔 거실 창 밖으로 새소리만 났다 하면 항상 반응을 보인다. 크기는 휴대용 블루투스 스피커인데, 성능은 한일전 응원가 수준이다. 이웃집에 미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긴, 이미 이사 올 때부터 코흘리개 아이 셋 달은 거 보고 진즉에 알아봤겠지. 심지어 애들 없을 시간인데도 애비가 피아노까지 두들기니 말해 뭐해. 어휴... 옆집 아랫집 할 거 없이 그 집 그냥 놔둬라 놔둬하며 포기했을 거다.




주인과 애완조라는 가면을 쓴 둘만의 대환장 파티. 그렇게나 목청이 큰 데, 정작 통하는 목소리는 없다. 말은 많은데, 처음부터 끝까지 동문서답이다. 외출 한 번 없이 24시간을 같이 지냈지만 아는 게 없다. 삼시 세끼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주지만, 그렇게 세 번 눈 마주칠 때조차 마음은 허하다.  


너는 틈나는 대로 부리로 깃털을 솎아 고운 자태를 유지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는데, 나는 어떤 것으로도 너에게 마음을 전할 수 없다. 사람 말 따라 하는 다른 앵무새처럼, 네 소리를 흉내 낸다면 너와 내가 좀 더 가까워질까. 아니면, '앤트맨'이나 '와스프'처럼 네 크기에 맞춰져 공포감이 사라진다면, 너는 조금이라도 나를 덜 피할까.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으로만 끝난다. 그럼에도 속상함보다는 애처롭달까, 미안함도 같이 일렁인다. 발화한들 답을 받을 길 없어 속으로 다시 물어본다: 나는 너를 왜 키우는 걸까. 답이 없어 질문만이라도 계속 던진다.


평행선을 걷는 둘. 이유나 답은 물론 우리의 관계가 어디쯤 와 있는지도 알 리가 없다. 차라리 모른다가 솔직한 답이다. 그냥 줬으니 받았고, 받았으니 키운다. 1년 지나도 생기지 않은 교감이 갑작스레 해 넘긴다고 생길 리 없다. 유소년, 청년, 하다 못해 장년도 아닌 노년이 되어 처음 접한 이에게 마음을 준다한들 과연 얼마나 줄 수 있을까. 이성으로 사유하고 감정으로 되짚어 확인하는 인간 역시, 나이 먹고 경험이 쌓이면서 흥미가 줄어들고 감탄이 실종되다가 궁극에는 의지와 감정 등 마음의 문 마저 닫는 게 흔한데.


어느새 1년 9개월이 지났고, 석 달 후면 입양 2주년이 된다. 아이들은 기념일 파티를 하자 할 것이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씨앗 잔치를 벌일 거다. 새장 문 열고 나오라 하고, 좇아 다니며 사진을 남기겠지. 노년 새鳥와 소년人間은 지금 그곳 그대로의 순간을 즐기며 투명한 수채화를 그릴 거다. 삐꼬를 가운데 두고 애들 얼굴 모아 보라며 아빠 역시 야단법석 떨겠지. 애들은 저마다 삐꼬를 보며, "삐꼬야, 우리에게 와줘서 고마워", "삐꼬야, 올해도 건강하게 지내서 너무 좋아.", "앞으로도 변함없이 잘 지내자, 삐꼬 사랑해." 하며 축복의 세례를 부을 거다. 


존재만으로 기쁨이 된다는 건 생명 자체가 지닌 힘이다. 언어마저 초월하는 힘. 그 힘을 너에게서 본다.



사진: 삐꼬와 둘째가 접은 종이새

매거진의 이전글 카톡이 편지가 될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