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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Sep 02. 2022

카톡이 편지가 될 때

보고 싶어

국민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께선 아침 자습 시간에 편지를 쓰게 하셨다. 그때는 토요일도 학교를 다녔으니까 한 주면 여섯 명의 반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한 달이면 스물넷, 두 달이면 반 애들에게 적어도 한 번씩은 편지를 쓴 셈이다. 숙제이기도 했지만, 쓰다 보니 알고 싶어서 자연스레 썼다. 


1학기를 마치고 여름 방학 시작 전, 선생님께선 애들을 불러 캐비닛에 모아 둔 편지를 꺼내 대략적으로 확인하게 하셨다. 매일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쓴 단 한 장의 편지인데, 몇 달을 모아 두니 제법 양이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인기 있는 애들과 없는 애들의 차이는 제법 컸다. 


장수를 세어 보지 않더라도 자기 이름 앞으로 배달된 분량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아이들은 2학기가 되자 보다 열심히 썼다. 더불어 서로 더 친해지려고 했다. 짓궂은 장난을 치던 애들도 조금씩 그 빈도가 줄었다. 저마다 인기 있고 싶어 지고, 편지를 좀 더 받았으면 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지금 브런치에서 라이킷을 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꼭 그런 계산에서만 기인한 건 아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다들 흩어지니까. 바로 옆에는 이름마저 거의 같은 중학교가 담 하나를 두고 붙어 있었다. 국민학교 눈높이에선 당연히 그대로 같이 올라가려니 했지만, 선생님께선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중학교 입학식 날, 익숙한 친구보다 처음 보는 얼굴이 훨씬 많았다.




국민학교 졸업하기 하루 전날, 선생님께선 벽돌 두께의 편지 다발을 꺼내셨다. 한 명씩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에선 다들 웃음이 흘렀다. 그러다 살짝씩 차분해지는 때가 있었다. 인기 있는 친구는 누가 봐도 사전일 정도로 두툼했지만, 심한 장난이나 못 살게 굴던 아이의 경우엔 손가락 굵기에 지나지 않는 편지 다발.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신경 좀 쓸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일었다.


중학생 시절엔 편지에 대한 별다른 기억이 없다. 매일 보고 지내는 데 무슨 낯간지럽게 편지냐 싶었을 거다. 국민학생 때 쓴 흰 종이에 줄만 그어져 있는 편선지보다, 멋진 사진이나 그림이 있는 엽서를 썼다. 뒷면엔 반을 나눠서 오른쪽엔 받을 친구와 보내는 내 이름을 적으니, 나머지 반만 채워도 뭔가 하나를 이뤄낸 것 같은 성취감도 쉽게 들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우리에겐 휴대폰이 없었다. 학교에서 금지한 게 아니라 그냥 없어서다. 삐삐를 가지고는 다녔지만, 그냥 장식품이자 장난감이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우리는 가나다도 ABC도 아닌 오직 숫자만으로 서로의 상황을 파악하는 셜록홈즈와 왓슨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좀 산다 하는 친구가 시티폰을 가져왔고, 다들 신기해서 우르르 몰려 들어서 난리통을 치렀다.


당시 교실은 지금의 모바일 데이터 못지않은 40여 명의 학급 단위로 나름 체계적인 오프라인 망 구축을 이뤘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쪽지가 분단을 넘나들고, 때로는 직접 전달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기술 좋게 던져서 뒤통수를 맞추기도 했다. 선생님의 감시를 피해 알아서 잠시 지연 처리를 하거나 심지어 전송 도중 취소 및 회수도 가능했다.


그렇다고 항상 짧은 쪽지만 나누던 건 아니었다. 모둠 일기라 해서 같은 조원끼리 돌려 쓰는 공책이 있었다. 그야말로 서울 각지에서 온 애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안물안궁이라 해도 알아서 20문 20답을 쓰거나,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의 취미를 얘기하거나 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그렇게 알아가려고 했다. 재미난 글은 조회수가 올라가듯, 애들 사이에 언급이 많이 되면서, 쉬는 시간에 직접 그 글을 확인하기도 했다.

 



대학생이 되자 휴대폰과 함께 인터넷의 세상이 열리며 한메일, 핫메일 등 이메일 주소를 서로 만들기 시작했다. 대개는 레포트 제출용이었지만, 나는 그때부터 다시 편지 쓰기를 시작한 듯싶다. 소식을 전하면서 상대의 안부를 묻고, 같이 공유했던 추억거리를 잠깐씩 언급하다 보면 본문은 어느새 제법 양이 찼다. 


상대에게 답장이 없더라도 괜찮았다. 그런 게 익숙해서. 내가 먼저 말 걸고, 딱히 뭘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얘기 주저리주저리 하고, 말 끝마다 자꾸 보고 싶다 하고. 그런 게 익숙하다. 물론 답장이 오면 세상 날아갈 듯 기쁘고, 고맙고, 행복하지만, 없다 해도 괜찮다. 


그는 내가 아니니까. 내가 이렇다 해서 상대방에게도 그러길 바라는 건, 단순히 바라는 게 아니라 거래가 되니까. 나아가 집착이 되고, 은근한 압박으로 변질될 수 있기에. 그 수순까지 간다면 순수한 마음은 사라지고 미저리만 남는다. 순진한 바보 머저리가 낫지, 숭악한 광인狂人 미저리가 되고 싶진 않다.




시간은 모든 걸 앗아간다. 시간은 부모님 아름다운 신혼 사진을 빛바래게 하고, 내 소중했던 물건의 힘을 잃게 한다. 사진을 자꾸 본다는 건 내 추억을 찾고 싶어서다. 그 마저도 풍경보다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바라보며 미소를 잠깐씩 띠는 건, 사진 속 사람의 표정을 보며 그때 주고 받은 이야기를 떠올려 보는 데에 있다. 그러니 추억은 더는 사물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내가 마음을 주고, 내게 마음으로 화답해 준 그 사람에게.


멀리 있다 보니 시간이 맞지 않아 전화 연결이 쉽지 않다. 업무 전화는 피차 시차 계산도 안 하고 들이밀지만, 개인 전화는 항상 몇 번이고 고민하게 만든다. 전화해도 될까. 아무 때나 전화하라고 했는데, 정말 해도 될까. 이런 저런 고민과 배려 속에 갈팡질팡 하다 보면, 시간은 이미 떠난지 오래된 막차가 되고 만다. 


그러니 안부를 묻는 예고 없는 전화는 더더욱 한 번에 연결되기가 어렵다. 열 번을 전화하면, 열 번 다 한 번도 연결이 안 되는 때도 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고 서운했지만, 순간 나는 마덕리의 한량 촌놈이고, 그들은 촌각을 다투며 사는 도시직장인이자 사장님이라는 사실을 깜빡했다는 걸 알고 어깨에 힘이 빠진다. 


그래서 만인의 메신저, 카톡을 이용한다. 생각나는 대로 바로 쓸 수 있어서 좋다. 지금 당장은 일 때문에 확인을 안 하거나 못해도, 나중에는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부담없이 쓴다. 시시콜콜 얘기하다 보면 굳은 마음이 말랑해진다. 가벼운 수다, 간단한 안부 정도 물어보려던 몇 줄의 문자는 이내 평소 생각하던 바를 막대기에 솜사탕 타래를 건지듯 모양을 갖추며 편지가 된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열세 살 국민학교 6학년으로 돌아간다.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조금 더 알고 싶어서. 그저 네가 좋아서 쓰던 그때 그 편지.



photo by jonas leupe, unslap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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