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의 자존심
막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습니다. 스페인은 만 6세에 초등학교를 시작해요. 유치원 졸업하기도 전에 선생님과 헤어지기 싫다며 집에 오는 길에 몇 번씩 눈물을 보였던 막내. 반 친구는 어찌 될지, 선생님은 어떤 분을 만날지. 이미 두 아들을 키웠지만,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감추기 힘든 긴장을 선사합니다.
반 애들은 거의 80% 이상이 그대로 올라갔습니다. 말썽꾸러기 녀석도 그대로 올라왔고, 단짝 친구도 변함없이 그대로여서 다행입니다. 두 분의 선생님이 담임이 되어 스무 명의 아이들을 맡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막내는 학교에서 벌어진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달하려고, 아침 등교는 물론, 집에서 점심 먹으러 하교하고, 다시 오후 등교해서 두 시간 만에 하교하기까지 두 번의 왕복길을 조용히 간 적이 없습니다.
1학년 아이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스마일 스티커, 즉 <누가 선생님한테 칭찬을 제일 많이 받지?>입니다. 매일 10분씩 책 읽기 숙제를 알림장에 적고, 부모님한테 확인받고, 그걸 선생님한테 다시 보여주고. 그러다 누군가 한 명이 10분을 넘긴 사실이 알려지면, 아이들은 그날로 자기도 더 읽겠다며 알림장에 15분, 30분이라고 분명하게 시간을 써 달라고 부탁합니다. 10분 넘게 읽은 아이에게는 스티커가 한 장 더 주어지니까요. 스티커를 받는 경로가 다양하다는 게 다행입니다. 독서 하나뿐이었으면 금방 심심했을 거예요.
스티커가 어느 정도 모이면 선생님은 깜짝 선물을 하나 줍니다. 뭘까요?
연필입니다. 세상에나! 그것도 그냥 연필이 아니라 이름하야 <마술 연필>, lápiz mágico 라삐스 마히꼬 입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연필, 지우개, 필통, 노트 등 기본적인 필기도구를 전 학생에게 동일하게 무료로 제공합니다. 풀, 가위, 자, 색연필, 연필깎이 등은 같이 나눠서 쓰게 하고요. (학교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똑같은 연필을 쓰는 상황에서 칭찬 스티커의 선물로 선생님께 하사 받는 마술연필은 그야말로 자부심 그 자체입니다. 딱 한 자루를 쥐고 올림픽 성화 봉송하듯 의기양양한 모습이, 누가 보면 파버-카스텔 연필이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만년필도 아니고 연필 하나에 그렇게나 좋아서 팔짝 뛸 일인가? 싶은데, 아이의 눈에는 그게 아닌가 봅니다. 마술연필 첫 수상자가 나오자 그날 막내는 종일 마술연필 얘기만 했습니다. 그러더니 독서뿐만 아니라 노트에 열심히 쓰기 연습을 합니다. 글씨도 잘 쓰면 마술연필을 받을 수 있다 했다네요.
그러더니 지성이면 감천인지, 화요일 오후 수업까지 마치고 데려오는 날, 막내는 냅다 소리를 지릅니다. 아빠 저 마술연필 받았어요. 제가 쓴 거 좀 보세요. 진짜 잘 썼죠? 선생님이 글씨 잘 쓴다고 칭찬 스티커 주시고, 이렇게 마술연필도 주셨어요. 도보 10분이면 갈 하굣길에 아이는 연필을 쥐고 허공에 몇 번이고 단어를 쓰며 신이 났습니다. 누가 보면 작가집안에서 큰 줄 알겠어요. 딸을 위해서라도 출간작가로 발돋움 해야 될 듯 합니다.
집에 도착해도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은 막내는 두 오빠에게도 자신의 상을 소개합니다. 오빠, 이것 좀 봐봐, 이게 바로 마술연필이야. 부럽지? 부럽지? 학교에서 쓴 거 보고 선생님이 칭찬하시더니 주셨어.
시큰둥할 거라 생각했던 오빠들의 반응이 가히 예능 프로그램 리액션과 맞먹습니다. 두 글자로 헐, 대박! 딱 그거였습니다. 하긴 미리 표시한 점선도 없는 백지에 스페인어 단어를 인쇄체도 아닌 필기체로 쓴 걸 보면 놀랍습니다. 하나하나에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가 그대로 보여서요. ㅡ 참고로, 스페인에선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는 인쇄체가 아닌 필기체로 쓰고, 읽습니다. 인쇄체는 오히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익히기 시작합니다.
막내는 귀한 보검 마냥 아빠의 두 손에 조심스레 올려놓으며 한 번 써 보시라고, 이건 마술연필이라고,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써 볼까? 헐, 대박!
배경 사진처럼 연필의 색만 분홍색일 뿐 기존에 쓰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노련미가 돋보이는 순간일까요? 나이는 정말 젊어 보이시던데, 이런 반전이. 역대급 플라시보 효과(위약효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분명 다르다고 합니다. 연필심 끝이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고, 심지어 말랑말랑 하다는 겁니다. 나름의 세세한 묘사까지 하며 연필에 진심인 막내에게, 아이고 얘야, 아니야, 이건 네가 학교에서 받아서 쓰는 거랑 완전 똑같아. 이 말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너무도 행복해하는 모습에 빙긋 웃고만 말았습니다.
연필 한 다스도 아닌 한 자루만으로 그날부터 지금까지 초등학교 1학년 막내는 분홍색 마술연필로 행복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겠죠. 워낙에 쓰고 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에겐 연필도 연필이지만, 선생님에게 인정받았음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부심이자 자존심이 되었으니까요. 그날 알림장에는 선생님이 써 준 칭찬과 축하의 글까지, 아이는 연필을 쥐고 자유의 여신상이 되어 그대로 날아올랐습니다.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지만, 아이가 아이답게 크는 모습도 복이라는 생각에 바라보는 아빠 역시 흐뭇해집니다.
제 인생에 자부심이 되는 물건이 있나 생각해 봅니다. 물건 자체가 아닌 물건에 깃든 스토리 덕분이겠지요. 저에게는 아버지께서 주신 20년도 더 된 회색 바탕과 검은색 중앙 사이 금색선이 들어간 커프스입니다. 그걸 드레스 셔츠에 채울 때면 흐트러진 마음을 반듯하게 잡고 자신감이 서게 됩니다. 아버지의 기운을 물려받아서일까요. 좋은 날을 기대하며 정성스레 다린 셔츠의 손목 부위를 접은 자리, 네 겹의 홀을 관통해 커프스를 끼우고 돌려 채우는 순간, 하루 일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빛을 내며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