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us grand est l'obstacle, et plus grand est la glorie de le surmonter. -Molière
도전이 클수록, 이를 극복할 때의 영광은 더욱 크다 -몰리에르 (17세기 프랑스의 대문호)
스페인에는 세르반테스가 있고,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몰리에르가 있다. 지금의 스페인어를 세르반테스의 언어라고 부르듯, 현대의 프랑스어는 몰리에르의 언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희극은 수준 낮은 장르로 차마 문학으로 치지도 않았다. 오로지 장엄한 비극만이 진정한 문학으로 칭송받던 때였다. 그런 시대의 사조를 몰리에르는 바꿔놓았다. 그의 작품은 태양왕 루이 14세가 아니면 아무도 부정 못할 반열까지 올라갔다. 수많은 작가들이 이루어 놓은 비극의 아우라에 대항할 희극의 세계관을 몰리에르는 홀로 이뤄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명성을 가졌지만, 그의 작품은 발표할 때마다 순탄하게 넘어간 적이 없었다. 기존의 형식을 파괴함은 물론, 내용 또한 당시 사회에서 용인하기에는 대단히 도전적이었기에 반발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그는 해냈다. 그리고 지독한 시기와 질투를 뛰어넘어 얻은 그의 업적은 비록 예명이긴 했어도, 그의 이름의 영광 그 자체로 빛을 발했다.
인생이 쉽다는 건 든든한 부모님 아래 있을 때만 가능한 것 같다. 현대 한국의 수저론을 떠나 생각하더라도 부모와 가정이라는 우산 아래에 있는 한 삶은 그렇게까지 고통받는 처지에 다다르지 않을 것이다. 재벌가의 자제가 아니더라도 끼니 건너뛴 적 한 번도 없었고, 피아노, 태권도, 미술 등 과외 활동으로 혹시나 다른 재능이 있을까 하여 두루 학원을 다녀보았다. 1997년 말 IMF로 사회가 붕괴되던 당시, 당신마저도 평생 충성을 바쳐온 직장에서 명예퇴직이라는 냉정한 통보에 세상 무너질 것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조차 어떻게든 자식 놈 대학교육은 마치겠다는 일념 하나를 붙드셨고, 궁극에는 그 뜻을 다 이루셨다. 일생 처음으로 아버지께서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으신 채 꺽꺽대며 가슴을 치고 진한 눈물을 쏟으시는 걸 거실 건너 방에서 생생하게 전해 들은 아들은, 이후 무엇을 해도 아버지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 드리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징어 게임에서 최후의 1인으로 살아남을 정도의 현금을 통장에 꽂아 넣지 않는 한, 당신께 아들은 평생 걱정거리가 되지 않겠느냐는 죄스런 마음도 들었다. 물론, 아버지께서는 부정하실 것이다. 이제는 본인도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으니, 입장을 바꿔 그 자식들이 당시의 그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대번에 그게 무슨 소리냐며 버럭 역정을 낼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손 탈게 많은 천상 자식이라는 페르소나를 벗을 수 없는 아비인 자식은 아버지에게 죄스런 마음을 벗어던지기가 어렵다.
졸업할 때까지 딱히 '도전'이라는 걸 모른 채 온실 속 화초로 커온 큰아들. 그는 졸업 후 '문송합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유행어가 나오기도 전에 살짝 쉬운 길을 택했다. 다음과 허황된 같은 말로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자신의 얘기가 빠진 자기소개서와 제품 매뉴얼에나 등장할 스펙 쌓기로 취업 준비해서 기업의 부속품이 되기 싫다. 그는 계속 합리적인 핑곗거리를 찾았다. 출근하자마자 퇴근을 떠올리는 직장인보다는 이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학생들에게 보다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선생님이 되겠다는 식의 거창한 포부, 내지는 정신승리를 말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학창 시절 착실하게 교원자격증을 준비해서 정식 교사의 길을 걸어가기보다 우유부단함 속에 머뭇거리다 타이밍을 놓친 건 쉬쉬하다 결국 입시학원 영어강사의 문을 두드렸다는 사실은 애써 회피하면서. 학생 때나 성인이 되서나 할 줄 아는 거라곤 오로지 말로 하는 거 외엔 없던 그에게 영어강사의 길은 쉽고, 편하고, 능숙했다. 먼저 학원계로 진출한 친구의 도움이 있었기에 소프트랜딩을 잘 이룰 수 있었다. 번듯한 기업에 폼나는 명함을 가진 엄친아 엄친딸 소식에 부모님 속은 타들어 갔다. 이미 20년간 장기 학생의 신분으로 있었음에도 여전히 교실의 공간을 좋아하는 아들을 두고 부모님께선 끊임없는 물음표를 떠올리셨다.
그렇게 도전이라고는 오로지 책으로만 접하던 그에게 어느 날 찾아온 해외취업의 길은 결혼까지 단 한방에 끝내줄 기회였다. 가슴속에선 RPM이 마구 치솟았음에도 목소리는 떨림 하나 없이 한 시간 반 가량의 면접을 마치고 며칠 후 오스트리아 빈 행 비행기표를 끊고 수속을 밟았다. 사회인으로 내디딘 첫 도전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로 오던 밤은 그야말로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그 자체였다. 맨땅에 헤딩이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 얼얼할 정도로 이루어졌고, 그때의 경험은 샌님처럼 조용하기만 하던 자신을 아주 조금씩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는 한 누구도 자신을 돕거나 알려주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니 어떻게 그런 것도 몰라?'가 일반적인 반응이다. 학교를 벗어난 직장이고, 한국을 벗어난 해외니까. 다만, 사람 좋아하는 성격이 일에도 고스란히 반영되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진지하게 미팅을 잡든 수다를 떨다 툭 건네든, 전화든 메시지든,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관계를 일과 더불어 만들어갔다.
좋은 분들 덕에 실적이 쌓여갔고, 자연스레 입소문을 타고 헤드헌터의 사냥감이 되었다. 일 년의 장고 끝에 슬로박에 올 때처럼 다시 스페인으로 왔고 올 때의 포부는 그야말로 남달랐다. 맨땅에 헤딩도 아니고 드릴로 파 내려가겠다는 식의 비장한 마음가짐이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무너졌다.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원양어선단에 잡힌 참치가 그 자리에서 급속 냉각으로 얼리고 이후 기계에 썰려 나가 바로 통조림으로 직행하듯. 1톤이 넘는 개복치가 단 한 사람의 주방장 손 끝에서 20분 안 돼 흔적도 없이 해체되는 것처럼. 번 아웃된 사람에게 창의성을 요구하다니. 언어폭력 앞에 무력하게 꿇린 사람에게 도전이라니. 그런데 뭘 더.
그럼에도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인간에게 상처받음이 다시 사람으로 치유되고, 말로 짓뭉개 진 가슴이 언어로 치료받는다는 점이다.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전해지는 진심. 그게 다시 도전의 길로 뛰어들게 만들었다.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사람을 주저하게 만든다. 과연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라는 끊임없는 의심. 파블로프의 개처럼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마다 자동으로 떠오르는 과거의 참혹했던 실패. 가만있으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근심의 공포. 모든 부정적인 것은 두려움으로 몰아가고 주저하게 만든다.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건, 실패는 망가지는 게 아니라 경험이자 과정의 단계라는 인식의 전환이다. 진지함과 진실함은 유지하되 부담스러울 정도로 의미를 부여하는데서 거리를 두라는 얘기이다. 진정성은 추구하되 집착하지 말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실패할까 두렵다면, 두려움이라는 추상적인 공에 자꾸만 바람을 불어넣지 말고, 무엇이 두려운지, 왜 두려운지를 구체적으로 적어 보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어지간한 정보며 지식이 검색만 하면 얼마든지 나온다. 지금 당장 논문을 작성해야 하는 것도, 유엔 회의 기조연설을 준비해야 하는 것도 아닌, 일상을 살아가면서 맞닥뜨릴 업무이자 숙제에 불과하다.
그러니 준비를 하자.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을 하자. 이등병의 관등성명처럼 언제 어디를 찔리든 자연스럽고도 즉각 튀어나올 정도로 준비를 하자. 그도 하면 나도 하는 것이다. 나도 하는 거라면 당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시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심호흡 속에 생각을 가다듬자. 노트를 펴 정리하며, 랩탑을 켜 써내려 보자. 자신감은 준비해서 나온다. 큰 그림을 볼 줄 알면, 세부사항을 이루는 디테일에 신경 써보고,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엮어보자. 하다가 안 되면 실패가 아니다. 그건 본인이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지표이자 신호일뿐이다. 과정은 지나가는 길이지 끝이 아니다.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일이며 그대로 종료될 결과가 아니다. 나는 나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지, 풋풋한 청춘의 시절이 지났다 하여 인생이 끝난 게 아니다. 나는 도전 속에 자신을 끊임없이 성장시킬 역동적인 존재,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