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입니다
잘 될 거고,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에도 듣던 말씀이었는데, 유난히 그날따라 깊숙이 와 박혔다.
이유가 뭐였을까. 내 상태가 너무도 절박했다는 반증이었을까.
무언가 울컥거림이 역류성 식도염처럼 올라와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힘들 때마다 예전 직장상사의 폭언에 시달리던 기억 서랍을 일부러 꺼내본다.
시간이 흘러 그 사람이 표창처럼 던져대던 말들은 녹이 슬고 삭았지만,
당시 '나'라는 인간 자체는 껍데기만 있을 뿐 속은 거의 붕괴되고 남은 게 없었다.
주위에서 조차 요청하지도 않은 충조평판을 내뱉으며 2차, 3차 계속 베이던 그 시절.
잊고 살아도 괜찮을 그때를 끄집어내는 건 딱지를 뜯어내고 상처를 덧내려는 게 아니다.
당시의 고통과 시련으로 사람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넓어지고 깊어졌는지를 떠올려보려는 것이다.
처절한 실패가 아니라 성장과 숙성의 과정으로 치환되던 때를 상기하고 싶어서다.
나도 나를 온전히 모르면서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애당초 성립되지 않을 말일 수 있다.
그렇기에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는 건 이해 자체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말로 볼 수 있다.
나도 이전에 비슷한 일을 겪어 세상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싶었는데,
당신도 지금 그런 심정이라 하니 얼마나 힘들겠느냐고.
다 알 수는 없지만 이해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같이 클리넥스를 수없이 뽑으며 풀어내고 싶다고.
글로 다 써 내려가지 못할 저마다의 대하드라마를 온몸으로 겪어 내고도
지금 이 자리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허허롭게 버티고 있는 그대는 진정 위인이며 달인이라고.
가진 게 그저 몸뿐이라 미안한 마음에 그저 다가가서 꼬옥 붙들고 안아 한동안 가만히 있고 싶다고.
30대 초반 일순간 푸른 초장에서 모래사막이 된 정신은 잡초 하나 보지 못할 황폐함 그 자체였지만,
'이웃'이라는 주위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라는 오아시스를 키우는 양분이 되었다.
다 나 같은 줄 알았지.
우물 안 개구리, 하나만 알고 사는 사람처럼 위험하고 무식한 게 없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하고 지식을 쌓는다고 한들, 사람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받아들인 자는 결국, 허영심을 광합성 삼아 교만의 꽃과 오만의 열매를 맺어 민폐를 끼칠 뿐이다.
혜민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나는 어려울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그 어려움 덕분에 비로소 어려운 사람들이 보였다. 자신의 힘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일들.
이전 같았으면 겉 넘어가는 말로 "힘내세요, 기도할게요"라 했을 것이다.
너무 백번 양보해서 진심을 담아 전했다 해도 사실 이해를 못 하니 본의 아니게 입에 발린 말이 된다.
사람에겐 이성이 있으니 무조건 겪어봐야지만 아는 건 아니겠으나, 타인에 대한 이해는 이성의 사유보다는 감정의 선 넘음에서 시작되는 공감의 영역이 더 크다.
지금도 힘든 분들이 있으면 "힘내세요, 화이팅, 기도할게요."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머리에서 시켜서 나가는 말이 아니다. 마음에서 자동으로 일어난 반응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생명을 이어가듯,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어느새 나를 살아가게 하는 호흡이 되었다.
그래,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 감정을 들킨 것처럼, 그분의 말이 시공을 넘어 내 마음을 온통 뒤흔든 것은.
순간의 이벤트성이 아닌 평소의 언어와 글과 행동으로 알아 좋아하던 분이 건넨 말이기에 진심이 느껴졌다.
그 말이 나오기까지 그분 또한 자신만의 힘든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공감대가 넓어진다는 것은 경험의 폭이 커졌다는 것이고, 그만큼 이해의 그릇을 키웠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진심으로 상대가 잘 되기를 바라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거라 믿는다.
놀라운 건 그 메시지를 전달받고 난 후의 일이다. 갑작스러울 정도로 업무 연락이 여기저기서 왔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던 파울루 코엘류의 <연금술사>가 퍼뜩 떠올랐다. 중년의 나에게서 더는 초심자의 행운을 바랄 수 없고, 가혹한 시험만이 기다릴 뿐인데,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하나.
누군가는
타이밍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그들의 의미 없이 내뱉는 천마디보다 내가 진심을 담아 읽어내는 해석의 한마디가 중요하다.
그러니 그들은 예전에도 그러했듯 지금도 그러라고 해라.
나를 모르고, 내가 사랑하는 이를 모르는 지나가는 행인이 한 말은 그저 흘려 넘기면 그만이다.
배경 사진을 다시 바라본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해준 따스한 말이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이 아닌 응원, 격려, 지지, 위로의 따뜻한 말들.
나를 일으켜 세워준 그 말이 당신에게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잘 될 거고,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photos by greg rakozy & freestock from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