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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Sep 25. 2022

본질에 집중하고 싶다

오래 지나 이제 와서야 하는 얘기. 타이핑 전 잠깐 짧은 한숨을. 


너는 어떻게 아직도 그 나이 먹도록 그렇게 눈치가 없냐.

아니, 사회생활 제법 했을 나이인데, 그러면 이제 다 알만한 건 알 나이 아니에요?

이런 것까지 꼭 말을 해 줘야지 아나? 남들 하는 거 보면 느낌 안 와?

...


나는 눈치가 없다. 사내 정치라는 것도 모르겠다. 몰라서 모르겠고, 알아도 모르고 싶다.

상대방의 기분은 헤아릴 줄 안다. 12년 공교육 과정 중 중2 때 일 년을 제외하곤 주욱 남녀 공학을 지나 남녀 합반이었고, 대학 전공은 여초인 불어불문이었고, 군대마저도 카투사로 여성 부사관, 여성 동료들과 함께 보냈다.


학생이든 사회인이든 대부분은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집단, 그룹, 단체에서 몸 담아 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 덕분인지 공감도 잘하는 편이고, 내 말도 많이 할 땐 하지만, 남들의 말을 들어야 할 땐 귀를 한껏 세우고 (실제로 동이근이 있어 귀도 움직이는 편임), 적절한 타이밍에 리액션도 넣어가며 (그렇게 하라고 배워서 건성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마음에서 나온 반응으로), 추임새, 재진술, 질문 등 다양하게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척하면 알아서 척! 하는 건 못한다. 특히나 눈칫밥 싸움에서 나는 영락없이 꽝이다.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를 몰아가서, 알아서 생각하고, 알아서 판단하라는 식으로 하라는 건 정말 싫다. 왜 본질이 아닌 것으로 자꾸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건지, 나이가 들수록 더욱 모르겠다.


허심탄회까지 가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오픈해서 개인적인 감정 섞지 말고, 그저 일은 일대로, 서로 뻔히 마주하는 상황과 현실을 사실에 기반해서 얘기하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건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무조건 참고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텐데, 물어보는 게 무에 그리 잘못이며, 그런 걸 왜 눈치 없이 튀느냐며 찍어 누르는 건지 모르겠다. 차라리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인이라 퉁치는 현지인과 어설픈 그들의 언어 내지는 영어로 말을 하는 게 몇십 배 더 낫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답은 이미 빤히 정해 놓은 상태에서, 기준에 맞추면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지 하고, 못 하면 어떻게 그거 하나를 못하느냐 할 것이고, 넘으면 적정선을 모르느냐며 다그칠 게 빤한 기싸움.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바람에 사정없이 펄럭거리는 깃발처럼 꼬아서 받아들이고 해석해서 그러니까 그런 거지라는 식의 모든 것을 인과응보로 해석하려는 시도. 


인과응보도 사회와 개인을 보는 돋보기이다. 많은 경우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 살수록 본인이 세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더 많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게 되고, 그렇기에 뾰족했던 과거에 비해 보다 유연해지고 둥글둥글하게 대처하게 된다. 부조리한 구조나 불합리한 윗선의 위선은 건드리지 않은 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잘못된 인과응보식의 해석과 적용을 나는 반대한다. 

  

옆에서 모든 상황을 논리적이고 빈틈없이 잘 파악하며 훈수를 두는 그대는 그러면 왜 그 일에 적극 뛰어들지 않는가. 실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게지. 자신의 일에는 모든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고, 상대의 경우에는 척 보면 다 안다는 듯 얘기하는 그 이중적인 태도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만다.


무엇보다도 저들이 말하는 디테일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건 본질이 아닌 하등 쓸데없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알아서 기고, 눈치껏 요령 있게 행동해서,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라는 게 아니라, 그의 비서, 시종, 노예가 되어 달라는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디테일에 강한 사람이 있고, 디테일만 강한 사람이 있다. 본질을 지키는 사람은 디테일에도 강하다.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는 건 탄탄한 기본기를 전제로 한다. 본질을 잃어버린 채 디테일에만 매달리는 건 뿌리가 잘린 것도 모른 채 마지막 진액으로 곧 바람에 날리고 햇볕에 타들어갈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어떤 페르소나를 쓰고 있건 변치 않는 본질이 있다. 그건 윗대가리의 수시로 들쭉날쭉 대는 끓는 팥죽의 새알심 같은 소심한 기분을 살펴 본인을 면피하기 위함이 아니다. 자신이 맡은 업에 대한 명확한 인지와 분석 및 해결을 통해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을 둘러싼 타인, 그리고 그 사이에 발생하는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함에 있다. 


그건 나 하나만을 건사하기 위한 데 있지 않다. 본질을 무시하고 엉뚱한 데 에너지를 낭비하며 그것을 디테일에 완벽을 기하는 일이라며 헛물을 들이켜던 그 시간. 이제는 좀 달라졌을까.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란다. 다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 아닌가. 


아니, 그런 걸 꼭 말로 꼭꼭 집어서 알려줘야만 아는 건가. 멀쩡한 인간이라면,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유치원만 나왔어도, 설령 못 나왔어도, 그만큼의 나이를 먹었으면, 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온 시간이 있을진데, 그렇다면 눈치껏 알아서 파악했어야 될 일 아닌가.


photo by christin hume,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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