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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y 13. 2023

추억으로 남는 건 사진뿐일까?

여행 나온 이들의 추억을 채우는 것을 업으로 하는 나는 가이드이다. 저마다 떨리는 무릎, 아니 가슴을 안고 나온 그들에게 추억으로 남겨질 것은 무엇일까. 소셜 미디어에 미처 올리지 못한 삼천여 장의 사진일까, 아니면 냉장고 앞을 그득그득 채워줄 마그네틱일까.

여행지를 다니며 가는 곳마다 전달하는 설명도, 농반진반으로 너스레를 떨며 잊을만하면 한 번씩 터져 나오는 웃음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히고 말 순간의 즐거움이다.

그래서 그때의 기쁨과 행복을 간직하고자 사진으로 남기는 게 아닐까. 돈 있는 귀족과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왕족만이 자신의 초상화 몇 점을 겨우 남겼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휴대폰 하나로 원 없이 같은 포즈의 사진을 여러 장 찍고, 초당 다섯 컷의 연사도 원 없이 날리고, 아예 영상으로 주욱 이어간다. 찰나의 시간을 영원으로 이끌어 가고 있으니, 진정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삶을 비할 수 없이 풍요롭게 만들었다 하겠다.

그러나 그 사진조차 시간이 지나면 기억 저편에서 흐릿해진다. 당장 엊그제 다녀온 여행지만 하더라도 벌써 어디가 어디였는지 헷갈린다. 여기가 대체 바르셀로나의 자랑인 성가족 성당인지, 스페인에서 제일 크다는 세비야 대성당인지, 모스크와 성당이 절묘하게 섞인 코르도바 대성당인지, 스페인의 종교적 수도인 톨레도의 수석 대성당인지 당최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찍은 사진을 두 번 보지도 않을 자신의 습관을 알면서도 새로운 걸 보면 어느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본다. 하하 호호 웃지만 돌아서면 '그게 뭐였더라? 뭐 때문에 그랬지? 하며 까먹어도 손가락은 어느새 휴대폰과 사진기를 쥐고 있다.

하기사,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동남아 각국 왕조의 역사며, 비교 불가의 중남미 고대 문명에 대한 고증을 듣는다고 내 삶에 당장 변화가 생기진 않을 것이다. 사족 삼아 말하자면, 무시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객관적인 사실이라 해도 <시간>이라는 절대 속성 앞에 다 스러지고 만다. 나와 관련 없거나 있다 해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기에.

그러나 모르던 사실을 알았을 때의 기쁨, 웅장한 건축물을 볼 때 드는 경외감, 회화의 섬세한 붓터치에서 느끼는 위로, 단조의 음울한 선율에서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는 슬픔 등 오감을 통해 일어나는 감정을 보면, 이건 오직 그때 그 장소에 있는 나만이 느끼는 것이다.

그 감정은 분명 찰나의 순간이었음에도 오히려 영원히 남는다. 경험을 통해 생겨나, 공감을 통해 확대되며, 교감을 통해 재생산의 과정까지 겪는다.

사진 한 장을 봐도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육하원칙의 보도기사성 사실보다는, 웃고 울며 당시에 내가 느낀 행복과 슬픔의 감정이 더 짙게 그리고 먼저 튀어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추억으로 남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나 자신의 그릇으로 오롯이 담아가는 <감정>에 있다.


오늘 나의 감정은 어떤 추억을 쌓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가면 좋을까. 열정 가득했던 플라멩코 공연의 흥분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은 것을 보니 오늘밤도 그냥 넘어가기엔 어려울 것 같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서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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