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Sep 11. 2023

MBTI 권하는 사회

실은 권함을 넘어 집착까지 간 시국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대학생 시절 동아리 활동으로 관현악반에 들어갔다. 

남들이 취미로는 거의 하지 않는 오보에를 한 덕분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입단을 했다.

창단 이래 처음으로 오보에가 들어왔다며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연주회를 한 달 남짓 앞두고 악기를 도둑맞았다는 것.

어찌어찌하여 다른 학교에 찾아가 악기를 빌려 해결은 했지만, 

행사 이후 단원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궁여지책인지 타이밍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주위에서 지휘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 아마추어의 특권은 뭐든 해봐도 된다는 점이다. 얼떨결에 지휘봉을 잡았다.

유치원 학예 발표회 때에도 지휘를 한 적이 있으니 무려 14년 만의 일이었다.


이거슨 스페인 한량 인생 첫 지휘자 데뷔곡, 큰북을 울려라 ㅋㅋㅋ (쿵쿵쿵입니다. 웃는 거 아님 주의)




연주자는 본인의 파트에 충실하면 되지만, 지휘자는 전체를 봐야 한다.

(물론 생각 있는 연주자라면 자신에게만 함몰되어 있지 않고 큰 그림 속 흐름을 본다)

선율을 다루는 지휘도 결국 사람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다. 


전문가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그곳은 친목동호를 전제로 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을 움직이는 일이 먼저였다.


저마다의 연주 실력과 기량 이전에 (실은 그 정도의 레벨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지만)

마음의 합이 중요한 대학교 동아리 활동.

그러니 음악을 매개로 무언가를 같이 만들어 나갈 사람, 

곧 단원이자 친구를 먼저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잘 알 수 있을까? 

포인트는 '잘'이다. 빠르게나 쉽게, 또는 단순하게가 아니다.

서로를 잘 알아서, 마음을 나누고, 궁극에는 함께 멋진 곡을 만들어 가고 싶어서였다.


소중하니까. 잘하든 못하든 그 자리에는 다른 누가 아닌 네가 있어야만 곡을 들려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정기 연주회 당일, 모든 단원에게 줄 꽃을 한 송이씩 사들고 가서 나눠줬다. 


해서 단원들 중 일단 동기들을 우선 데리고 학생상담실에 가서 서로를 알아보자고 설득했다.

다들 흥미진진, 기대를 한가득 안고 재미 삼아 들어갔다.

내 인생 첫 MBTI 검사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검사 결과는 기억이 안 난다. 

결과를 들으면서 맞장구치는 부분도 있었지만,

긴가민가 싶은 것도 상당했다. 


아리송해하는 나를 보며 상담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검사 결과가 본인하고 안 맞는 경우라면, 

본인의 현재 상태와 앞으로 되고 싶은 상태를 혼동해서 그런 것일 수 있어요.


그때 나는 왜 그리도 그 말씀에 얼굴이 화끈거렸을까.


내가 솔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걸 들킨 기분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내 진짜 모습과 내가 꿈꾸는 나의 이상형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일관성 없는 답을 체크하는 것에 그대로 드러났다.

심지어 문항지를 풀던 도중 어? 이건 앞에서 본 것과 비슷한데 그때 뭐라고 했지? 하며 다시 앞장을 들추기도 했다. 


좋고 나쁨이 아닌 그저 나의 있는 그대로, 평소 성향과 경향을 알아보려는 질문조차 암기하듯 인위적으로 답을 만들어 가려는 내 모습이란.


법정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위증 조작의 달인. 

꼭꼭 숨어 살다가 빛을 본 순간 화들짝 놀란 바퀴벌레. 

몰래 선악과를 먹다 신께서 찾는 음성에 그만 목에 켁하고 걸린 아담.




 20년도 훨씬 더 지난 요즘에 와서 MBTI 가 유행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지만, 약간은 무섭기도 하다.


MBTI의 개념이 널리 알려지고, 친숙해진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만큼, 본래의 의도가 왜곡된 것 같아 씁쓸하다. 


MBTI에 대한 거의 절대적인 신뢰가 형성되었다.

헌데, 이것으로 타인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나와 다름을 수용할 그릇을 키우는 역할보다는 

빠르고 손쉽게 판단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듯싶다. 

심지어 어떤 성향이 다른 어떤 성향 대비 월등하단 식의 밈이나, 성향별 연봉 순위, 연애 궁합 등 각종 조사를 보면, 진실과 가치 여부를 떠나 우열을 나눠 차별을 더 조장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왜 대번에 면전에 대고 "너 I (내향적) 지?"라고 들이대는가.

왜 어떤 반응을 보자마자, "너 T(본래 사고형 존재를 뜻하나, 보통 공감력이 결여됐다는 식으로 취급함)야?" 라며 발작하는가. 그게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고. 


여전히 빨리빨리에 길들여져 브레이크를 멈출 줄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눈앞의 상대가 나와 비슷한 결을 지녔는지 아닌지를 판단해야만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 그러는 것일까.


복잡한 건 요즘 추세에 맞지 않는다는 걸 내세워 몇 개의 검사항목과 결과만으로 나와 상대를 가늠하여 틀 안에 욱여넣으려 한 건 아닌지. 그나마 16가지 정도로 나름 다양한 성향을 마련해 놓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 마저도 획일화 해서 니편 내편을 가르려는 것으로 보이는 건 그저 기우인 걸까. 그래, 기우면 좋겠다.


나도 너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쓸모와 무쓸모로 판단받아 값이 매겨질 물건이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대체불가능한 보물이자 보석이다. 




성숙한 사회로 간다는 것은, 하나 또는 몇 가지로 통합해 단순화하는 자동화 작업이 아니라

역으로 세분화와 세밀화를 기해 더 정밀하게 살펴보는 수작업이라 믿는다.


MBTI를 통해 한 인간에 대한 빠른 포착을 이뤘다면 

이제는 검사 결과에 대한 농담 따먹기식 놀이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정성과 노력을 기울일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우연으로 만난 것 같지만

너는 그리고 그는 

내 인생 시간표에서 

필연으로 만났어야 할 보물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한 아이는 그렇게 어른이 됐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