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처럼 사람을 분류하기 좋아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예전엔 흔히 혈액형으로 성격을 구분 지었었는데, 실제 해외에서 오래 생활을 해왔었지만 외국인 친구들에게 혈액형을 물어봐도 본인의 혈액형을 정확하게 알고 답변해 준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만큼 그들에겐 큰 관심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만나면 일단 호구조사를 기본으로 혈액형까지 알아낸 후에야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면 될지 대략의 '견적'이 나온다고 생각했었다. 겨우 4가지로 구분되는 혈액형의 틀에 상대를 끼워 넣고 내 맘대로 저 사람은 이러할 것이다라는 선입견을 장착하는 것이다.
그러했던 혈액형의 시절은 가고 이제는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의 시대가 왔다. 오래전에 한번 해봤었는데, 정확한 결과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듯 MBTI는 한번 정해진 것이 영원한 나의 타입이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올 수 있다고 한다. 하여, 인지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님은 MBTI를 성격 검사가 아니라 지난 3~4년간 내가 어떤 사회적 얼굴로 살아왔는지 비추는 거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현재 나의 꼬리표가 된 결과는 ESTJ다. 사실 이런 유형의 사람을 어디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느끼는 바는 상당히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유는 전혀(?) 모르겠으나 혹자는 ESTJ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봤다. E(extroversion) S(sensing) T(Thinking) J(Judging)는 외향적이고 실제적인 인식을 하며 사실과 진실 위주의 사고를 하고 상당히 계획적이다. 어디서 MBTI별 대표 이미지를 한 마디로 표현해 둔 것을 보니 ESTJ는 꼰. 대. 사. 장. 이란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사실 대체적으로 모든 것에 대해 기준치가 높은 편이다. 실제 그게 기준이 높다고 인지하지 못한 채 의례 당연한 줄 아는 경우가 많았는데, 실상 나와는 다른 성향을 가지신 분들 입장에서 바라보면 너무 완벽주의라고 느껴지는 때가 많은 모양이다.
같이 운동하는 친구 중 한 명이 앞 글자 하나 빼고는 뒤가 모두 같은 ISTJ인데, 나보다 조금 내향적이라는 것만 빼고는 나머지가 모두 같다 보니 나의 고민을 너무 찰떡으로 이해해 주며 한다는 소리가 걸작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 괴롭히지 말고 혼자 일해야 돼~"
그 말에 빵 터졌지만 순간 무릎을 탁 치며 깨달음이 왔다. 나 때문에 괴로운 사람들이 많아질 수도 있는 거지만, 실은 나의 기준에 못 미치는 경우에 대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쪽은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서로에게 해로운 관계라고나 할까...(세상에.. 앞자리를 E가 아니라 I로 바꿔야 찰떡이려나보다)
애초 MBTI를 만든 Myers(마이어스)와 Briggs(브릭스)는 모녀관계였다고 한다. 브릭스는 딸을 홈 스쿨링으로 교육시켰는데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딸에게 인간 유형의 다양성을 알려주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이 지표라고 한다.(출처: 마음의 지혜/김경일)
우리 딸을 보면 정말 나와 닮은 듯 다른 점이 참 많다.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감성이 풍부하고 상상력이 좋은 것으로 봐서는 나처럼 철저하게 현실적인 사고를 하는 타입은 아닌데, 그렇다 보니 종종 아이의 말과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는 때가 생긴다. 아이는 엄마로부터 뭔가 자신과 비슷한 감정이 폭발하는 반응을 기대하곤 하는데, 엄마란 사람은 너무도 객관적이고 차가울 때가 많은 것이다. 의도하지 않는데 아이가 상처받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것 같다.
이제는 아이가 예전보다 사리분별이 좀 더 성숙해진 무려 여덟 살의 어린이가 되었으니 얼마 전부터 우리의 성격적 차이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엄마는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을 해주지 않으면 네 속마음에 있는 의도를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얘기해 주며, 이렇게 사람은 각자 다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너와의 다름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해줬다. 생각보다 이 말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런 말을 해주고도 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애초 브릭스가 딸에게 인간 유형의 다양성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처럼 우리는 서로가 그렇게 제각각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건데, 나는 아직도 얼마나 많이 '다름'을 '불편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편견을 갖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은 또 아니지 않은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유유상종'을 외치며 살아왔는데, 어차피 자기 맘 가는 사람과 어울리게 되는 법 아니겠나. 처음부터 MBTI 유형을 알아내 나와 같은 편 vs 다른 편의 선을 그을 필요는 없지만, 정말 나와는 다른 사람을 봤을 때 결코 납득 못하겠다는 답답함을 느끼는 것보다 MBTI를 통해 아~ 그래서 나와는 이렇게 달랐구나~라며 이해할 수 있게끔 도와주니 이는 모두가 어렵게 느끼는 인간관계에 상당히 유용한 사회적 도구가 된 게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지금 어떠한 사회적 얼굴로 살아가고 있을까. 몇 년 뒤 다시 테스트를 해본다면 나는 어떤 결과를 얻게 될까. 마지막으로 구차한 변명을 하나 늘어놓자면, ESTJ의 피도 충분히 뜨끈하고 눈물샘은 고장 났나 싶게 많이 자주 흘린다. 그러니 너무 냉혈한이라 생각지 말아 주면 좋겠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MBTI>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