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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Oct 06. 2023

쓸모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야이 벤딩머신(자판기) 만도 못한 놈아, 넌 뭐 하는 놈이야?

벤딩머신은 1유로를 넣으면 1유로치 물건이라도 나오지, 

넌 그 돈 받아가면서 뭐 하는 거야?"


이미 십 년이나 지난 일임에도 그때 당시 상사의 분노와 고함은 생생합니다.

그 상사의 말에 충격과 공포를 느끼고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절망감, 자괴감, 

여기에 대인기피증까지 1년 남짓의 시간을 제정신이 아닌 채 살았습니다.

지금도 쓰면서 살짝 떨립니다. 오늘 글은 길게는 못 쓸 거 같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네, 맞습니다. 제가 일을 잘 못했어요.


머리가 브런치스토리의 글쓰기 버튼을 눌렀을 때처럼 아무것도 없이 완벽하게 하얘졌거든요.

벼락치기 시험공부하듯 아무리 자료를 보고 쓰고 만들어도 숫자가 머릿속에 안 들어왔습니다.

예상 질문과 적절한 답변을 생각해도 그분 앞에만 가면 다 사라져 버렸고요.

추위에 매장 밖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반려견이 호달달 떨듯 손이고 발이고 덜덜 떨었습니다.

상사 혼잣말이긴 했지만 "어휴 저 병신"이라는 푸념 섞인 소리도 들었죠.


모든 건 회사원으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팀원은 저에게 왜 맨날 당하느냐고, 들이받거나 인사과에 고발하라고 했지만,

그때마다 저는 다 제가 일을 못해서 생긴 일이니 저만 잘하면 된다고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었어요.


하지만 점심을 상사를 피해서 먹고, 먹을 때는 허겁지겁 음식을 쓸어 담듯 우걱우걱 씹어대고,

먹고 나면 응달진 곳에 아니면 화장실에 문을 닫고 들어가 잠시 웅크리고 있다 나오는 저는

전혀 괜찮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손 봐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는 블랙홀 그 자체였어요.

유일한 치료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빨아들이는 그곳에서 나오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탈출이었어요. 

그러나 나오고 나서도 후유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쉴 수도 없었습니다.

가정을 꾸려가야 했으니까요. 


주위 분들 덕에 구사일생으로 일을 구해 유사 업계, 업종에서 일은 했지만, 워낙 크게 충격을 받아서였는지 여전히 제 기능을 하진 못했습니다. 그 점은 결국 그곳에서도 상사와 갈등을 겪게 했지요.




이후 조직을 갖춘 직장에서 떠나 프리랜서가 되어 영어 강사가 되었을 때, 저는 제 쓸모를 찾았습니다.

다만 싱글이 아닌 가족이 있는 상태에서 스페인에서 영어 강사로 살아간다는 건 금전적으로 쉽지 않았어요.

감사하게도 다시 주위 분들의 추천과 도움으로 가이드업에 발을 들였고, 이후 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판기만도 못한, 돈만 축내는, 쓸모없는 폐급 인간으로 분류되던 저였거든요. 그러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에 '그래, 이거라도 한 번 해 볼까?' 해서 시작한 그 일은 시커멓던 석탄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재탄생시켜주었습니다.


제 평소의 관심사와 취미가 여행온 분들에게는 여행의 격을 높여주고, 재미난 강연의 시간이 되며,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가득 찬 샘의 원천이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나라는 존재는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나오는 걸까?


여전히 명쾌한 답을 찾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답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게 있다는 건 알았어요.


제가 저 자신으로 자신 있게 살아갈 때, 

그런 저를 응원해 주고 아낌없이 격려해 주는 분들이 생긴다는 것을요.

쓸모없는 인간은 없었어요. 저를 보니 그래요.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장자는 쓸모없는 나무도 쓸모가 있다고 했지요. 남들 보기에는 볼품도 없고 쓸모도 없어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다 하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제 천수를 누리며 그 자리에 남아 사람들에게 더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는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그러니 쓸모라는 건 상황에 따라 바뀐다고 봐야 할 겁니다.


실은 쓸모라는 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때를 기준으로 합니다. 도구적 관점이라 하겠어요.

하지만 도구적 관점을 넘어 존재 자체를 귀하게 바라보는 시선으로 사람을 보니 다시 보입니다.

저라는 쓸모없었던 존재도 새롭게 보이고요. 제 주위의 사람들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해요.


존재 자체로 의미가 되는 나를, 그리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김창완, 아이유가 들려주는 <너의 의미>

당신은 이미 존재 자체로 힘이 되어 주는 사람입니다.



제목 사진: 얼굴, 까이사 포럼,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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