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춘프카 Oct 10. 2023

"할 얘기가 있는데요"


이른 새벽 눈을 뜨자마자 뉴스를 살핀다. 맥북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한쪽 구석에 먼지가 자욱하게 앉은 복싱 글러브를 발견한다. 이곳 관장님은 가끔 내게 안부 문자를 보내주시는데 '끝까지 운동합시다. 세상을 위해 오늘도 원투!'라고 끝맺는다. 잠깐 다른 생각에 빠졌다가 메일함을 연다. 전국 곳곳에서 각자의 사연이 담긴 제보글이 쏟아진다. 모두 기사화될 순 없지만 짧게라도 답장을 남긴다. "잘 읽었습니다. 당장 기사로 쓸 순 없더라도 계속 관심 가지고 지켜보겠습니다"라며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 


평일엔 아빠와 떨어져 있는 아들과는 하루에 두 번 정도 영상 통화를 한다. 고작 4살인데 가끔 근사한 문장을 뽐낸다. 아들은 며칠 전에도 "말을 많이 하면 입술이 뜨거워져요"라고 짧게 말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괜히 마음에 닿았다. 통화뿐만 아니다. 등산을 함께 할 때나 처음 지하철을 탔을 때도 이따금씩 좋은 문장을 내게 알려줬다. 그럼 혹여나 까먹을까 봐 음성메모를 켜서 아이의 목소리를 남겨뒀다. 


뜬금없지만 매일 '무능'을 마주한다. 더 좋은 문장을 짓고 싶어서, 더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싶어서 계속 고민한다. 활자로 돼 있지 않은 현장을 그대로 옮겨놓고 싶어서 제법 용을 쓰지만 녹록지 않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탓하며 '쓸모'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나는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어떤 쓰임이 될지는 내 노력도 필요하지만 상대방이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만나는 이들은 특히 더 그렇다. 다 억울하거나 화가 나 있다. 분주하게 끄적이던 노트를 내려놓고 지그시 그를 바라본다. 퉁명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던 그는 잠깐 숨을 죽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할 얘기가 있는데요." 


그 찰나의 순간, 묘한 감정을 느낀다.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라고.  어쩌면 이 사람에게 나는 제법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고.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은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쓸모’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쓸모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