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이 한 단어가 만들어내는 중압감이 이렇게 컸던가. 어쩌다 나는 이 한 마디에 이렇게 갇혀버렸을까.’
퇴사 후 꾀나 오랫동안 나의 내면은 ‘쓸모없음‘의 늪에 빠져있었다. 회사를 나와 보니 한 가지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 '일'은 세상이 나의 쓸모를 인정해 준 하나의 기준이었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는 내가 그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퇴사까진 좋았는데, 여전히 나의 쓸모에 대한 정의가 바뀌지 않으니 참 오랜 시간 '쓸모'라는 단어가 '무쓸모', '무가치함'으로 변해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내가 만들어낸 마음의 진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 바로 '아빠'라는 쓸모와 '나'라는 쓸모를 인정하고 난 뒤에야.
‘쓸모없음’의 늪은 농도가 진해 잘못 발을 디딘다 해도 갯벌에 발이 빠지는 것 보다도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래서 처음엔 언제든 돌아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어느새 허리춤까지 잠겨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되어서야 큰일이 났음을 깨닫게 된다.
이쯤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든다. 그래서 뭐라도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다. 덕분에 삶은 분주하다. 그러나 뚜렷한 목적도 방향도 없다. 한마디로 억지스러운 분주함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것을 반복한다. 시간은 흐르고 에너지를 쏟아붓는 양은 많은데 결과물은 없거나 미약하다. 결국 다시 제자리다. 아니 제자리면 차라리 다행이지. 오히려 늪에 더 깊이 빠져들어간다.
‘쓸모없음’에 ‘실패와 실망‘이 더해지니 그때부터 나의 삶은 온통 남에 대한 부러움과 나에 대한 실의뿐이었다.
어디가 바닥인지 모를 인생 하락기에 눈을 띄워준 존재가 있었다. 아들. 아내. 부모님. 그리고 나를 깊이 이해해 주고 기다려주고 응원해 준 친구들.
어쩌면 그동안의 시간은 그야말로 물갈이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오랜 습성을 바꾼다는 게 이만큼 어려운 일인 걸까. 사는 모양새는 바뀌어도 생각의 전환을 넘어 무의식의 틀이 깨지는 데까지 도달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빚어져 세상에 나오게 된 것들은 모두 다 제 쓸모가 있는 법이다.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게 이치다. 사람도 그렇다. 난 신을 믿기에, 창조의 섭리에 따라 빚어진 인생이라면 나의 쓸모는 내가 정의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다. 내가 나의 생각 속에 갇혀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내가 나의 쓸모를 정의하려 했다는 것.
그 마음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선명해진다. 아들에게, 아내에게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옆에 있어주는 것.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재능을 나누는 것. 무엇보다 삶을 글로 써 내려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쓸 수 있는 다정한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그것이 지금 나의 쓸모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제는 다시 무쓸모의 늪에 빠져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실수로 발을 담그게 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전과 같이 허리춤까지 잠기는 일은 없을 거라 기대한다.
누군가가 나와 같은 고민을 한다면 꼭 이야기해 주고 싶다. 당신의 쓸모는 당신이 속한 세상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나의 쓸모를 정의하면 그만이라고. 심지어 지금 마음이
가라앉고 침체기를 보내고 있을지라도 같은 마음고생 중인 사람들을 공감해 줄 수 있는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쓸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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