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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Nov 04. 2023

흰머리

호텔 객실에서 거울을 보다 엇, 생각보다 흰머리가 많이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 하면서도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어서일까.

흰머리가 한가닥씩 저마다 있는 힘을 다해 피어난 것처럼 머릿결에 섞이지 않고 홀로 튀어 올랐다.


국민학생 때 주말이면 아버지는 사우나를 항상 다녀오셨고, 집에 돌아오시면 나를 불러 양반 다리를 하라 하셨다. 그러면 무릎 위에 다소 불편하게 누우시며 족집게를 손에 들려주셨다.

 

뽑으라는 것이다, 흰머리를.

어린 내가 볼 땐 흰머리도 충분히 멋있어 보일 아버지이셨는데, 아버지는 흰머리 하나당 10원씩 줄 테니 뽑으라 하셨다.


아버지의 족집게를 전해받은 그 아이는 진중하게 한 올씩 뽑아 올렸다. 이따금씩 잘못 집어 검은 머리칼이 뜯기듯 같이 올라올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마이너스 처리를 하셨다. 그러나 십분 정도가 넘어가면 어른은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고, 그러다 아이의 다리가 저릴 때 즈음이면 부스스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한숨 주무셨다.




호텔의 거울을 보니 미남이신 아버지의 멋진 모습은 안 보인다.

다시 보니 삼십여 년 전 당신의 심정과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닮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쉼 없는 일정에 제법 지친듯한 눈동자.

눈가보다 이마의 주름이 눈에 띄고.

외부 활동으로 그을리고 상한 피부.

그 사이 촘촘하게 난 빳빳한 수염.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으로 생긴 것일지 아니면 스트레스로 생겨난 것일지 알 수 없지만,

드러난 것들이 말해주고 있다.


너는 수고하고 있다고

아버지는 아들의 무릎을 빌려 당신의 흰머리를 내맡길 때마다,

걱정도 근심도 하나씩 뽑히길 바라셨을까.


이제는 아예 흰머리 밖에 없다며 꾸준히 염색으로 검은 물을 들이시는 아버지.

뽑아드릴 게 없다.

걱정과 근심은 변함없이 여전할 텐데.

다 커서도 부모님께는 걱정의 상수값으로 존재하는 자식이다.


다시 거울을 본다.

그래, 수고했다. 고생 많았네, 오늘도.

말없는 위로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타고 전해온다.




제목 사진: 광장의 노인 부부 동상, 부르고스,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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