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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Dec 13. 2020

치유의 음악, 파헬벨의 캐논

음악은 청중도 연주자도 치유합니다

우리는 음악을 듣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재능과 노력이 더해진다면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때로는 작곡과 작사에까지 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곡을 듣는 것은 이성 보다는 감성을 매만져 주기 위함이 크지요. 장르를 불문하고 본인이 좋아하면 그것으로 음악 자체는 충분히 효용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피아노를 초등, 아니 국민학교 3학년 때 학원에서 배웠습니다. 사자 파마 머리를 멋지게 하고 다니시던 원장 선생님은 저와 같은 아파트 동에 사셔서 오고 가는 길에 인사를 자주 드렸어요. 그래서인지 원장님께 렛슨도 자주 받았어요. 원장님이 계신 그랜드 피아노에서 렛슨 받을 때면 유독 마음이 떨리곤 했습니다. 마치 연주회에 선 것 같았거든요. 


원장님이건 다른 선생님이건 간에 렛슨을 해 주시면 꼭 오른손으로 한 옥타브 올려서 같이 쳐 주시곤 했어요. 이게 저에겐 굉장한 흥분감을 안겨줬는데, 뭐랄까 요즘 유행중인 ASMR 과 비슷했어요. 대단찮은 곡 조차도 명곡 연주를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안겨줬거든요. 그래서 저도 집에서 두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는데 저도 모르게 자꾸 오른손으로 멜로디를 따라 쳐보곤 합니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알게 된 건 음악은 들을 때만 아니라 연주할 때에도 힐링이 작용한다는 거였어요. 즉, 청중에게만 감동을 선사하는 게 아니라 연주자에게도 말로 표현하기 힘든 치유가 멜로디에서건 손가락 끝에서건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이건 심지어 피아노 뿐 아니라 피아노가 팔리고서 배우게 된 오보에 에서도 키key감이 그랬고, 교회에서 쳐본 오르간도, 팀파니도 그랬어요.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제 개인의 의견일 뿐이기에 검증된 적도 없고 일반화될 수도 없음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매번 연주할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은 부인할 수 없기에 말씀 드려봅니다. 


취미였지만 6년 정도 배운 피아노와 2년간 정말 힘겹게 배운 오보에, 그리고 어깨너머로 배워본 교회의 타악기들, 거기에 대학 동아리였던 관현악반의 지휘자 활동에까지 저는 클래식 음악에 많이 심취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소개해 드릴 음악도 다소 그런 풍이 좀 있을겁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제가 직접 연주해서 올린 곡으로 같이 얘기를 나누며 공감의 폭을 넓혀 보고자 합니다. 




일단 오늘은 듣는 순간 2분 음표의 긴 호흡만으로도 모든 수고와 인내를 다 감싸주는 음악을 같이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곡은 듣는 여러분에게만 아니라 수백번 반복해서 연습하던 저에게도 동일한 위로와 힐링이 되어준 곡입니다. 바로 파헬벨의 현악을 위한 캐논을 피아노로 편곡한 조지 윈스턴의 캐논 변주곡입니다.


(좌) 요한 파헬벨 1653-1706 / (우) 조지 윈스턴 1949-


우리 귀에 익숙한 클래식을 꼽는다면 크게 비발디의 사계, 모차르트의 소야곡, 그리고 파헬벨의 캐논이 될 겁니다. 그 중 캐논은 워낙 다양한 음악 장르에 녹아 있어 클래식이었나 싶기도 하지요. 재즈, 롹, 힙합은 물론 국악으로도 나와 광고에서 인기를 얻었고요. 얼마 전엔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도 나와 많은 분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클래식의 매력은 접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의외로 어떤 타입에도 곧잘 응용되고 변형되는 밀가루와 같지 않나 합니다. 어떤 셰프의 손길을 거치는가에 따라 쫄깃한 국수가 되어 뜨끈한 국물에 얹혀지기도 하고, 달달한 빵이나 케잌이 되어 맛난 디저트도 되는 것처럼요. 


캐논 변주곡은 원래 그리스어로 규칙, 규범을 의미하는 카논Kanon에서 출발합니다. 미술에서는 확장된 의미로 이상적인 인체의 비례를 뜻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다빈치나 뒤러의 인체도가 이에 해당됩니다. 딱 팔등신(욕 아니죠)을 떠올리면 됩니다. 음악에서는 둘 이상의 성부가 (엄격히) 서로를 모방하는 기법을 뜻합니다. 쉽게 얘기해 어렸을 적 부르던 "다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와 같은 '돌림노래'가 바로 전형적인 캐논의 예입니다. 어렵게 말하면 대위법, 푸가 등으로 그것만으로 사전을 편찬할 정도의 분량이지요. 


17세기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독일의 작곡가 요한 파헬벨은 그렇게나 어마무시한 캐논을 단순한 선율 몇 개만으로 지금까지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곡을 써냅니다. 정말 대단한 능력자입니다. 원래는 해시태그, 아니 샵# 이 둘 달린 D 장조에 현을 위한 곡이었어요. 이걸 49년 소띠이신 저희 아버지와 동년배인 조지 윈스턴 님이 피아노만을 위한 변주곡 (한 주제를 다양하게 변형하는 형식) 으로 리메이크를 하면서 조성도 C 장조로 바꿉니다. 


왜 굳이 조표를 다 뗐을까요? 저처럼 피아노 연주를 취미로 하는 사람을 위해서 쉽게 만든게 아니라, 조성에 따른 분위기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D 장조는 밝고 화려하며 고상한 느낌을 주는 반면, C 장조는 소박하며 단순하며 웅장한 기운을 전하거든요.


그래서일까요. 첫 음의 등장부터가 이런저런 말 굳이 하지 않아도 그간의 모든 어려움과 수고를 어루만져 주는 듯 합니다. 경건함 마저 느껴질 정도에요. 갈수록 세세히 나눠지는 음표와 물 흐르듯 잔잔히 흐르는 선율은 세심히 토닥이며 소박한 위로를 전합니다. 찰나의 기쁨을 사라지지 않는 향이 되어 간직해 줍니다. 가시지 않을 것 같은 상처와 슬픔은 해 아래 눈이 되어 같이 울어주며 녹여 흘러 보냅니다.




한 생명의 탄생으로 세상에 빛을 전하는 광고에도 나오고, 한창 성장기 아이를 위한 선전에도,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는 감동의 순간에도 등장합니다. 심지어 한 인생을 거두는 장례식에서조차 함께 합니다. 인생의 굵직한 시절마다 두말않고 달려와 동행해 주는 음악입니다. 실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음악 형식상 가장 엄격한 규칙을 추구하기에 까다롭고 고루할 것만 같은 곡이 이처럼 한 인간이 마주하는 어떤 경우에도 잘 어울린다는 것은 이성과 논리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지요. 


그게 음악의 힘입니다. 그것은 신이 그냥 주어 된 것이 아닙니다. 신이 창조한 사람이, 마찬가지로 신이 창조한 그대를 사랑하기에 그 사랑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닐런지요. 하여 수백년 전 처음 곡을 쓴 이도, 현대에 다시 편곡한 분도, 그걸 연주하는 부족한 자도, 지금 이 곡을 들으며 글을 읽는 여러분도, 실은 음악이 빚어내는 장엄한 순간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지요. 모두가 캐논의 선율로 그저 지나쳐 버릴 순간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마음을 수놓고 있는 것입니다. 


스티브가 연주한 캐논 변주곡 감상

https://www.youtube.com/watch?v=b6Kmmmfi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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