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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Apr 23. 2021

내게 "행복한" 여행이란 언제였나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여행에서 돌아오면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여행객들과 사뭇 다를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어딜 다녀왔는지, 우리가 무엇을 봤는지를

똑똑히 기억할 거예요.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And when we DO return, it shall not be like other travellers, 

without being able to give one accurate idea of anything. 

We WILL know where we have gone—

we WILL recollect what we have seen.


-<Pride and Prejudice> Jane Austeen




Q. 행복한 여행의 기억


A. 여행은 참 많이 다녀봤는데, 내게 [행복한] 여행이란 과연 언제였을까. 


코로나 이전 손님들과 떠나는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를 누비고 다니는 여행도 좋고, 세 아이들을 다 데리고 봄철 부활절 휴가로 비행기 타고 가 본 마요르카 호캉스도 좋았다. 뜨거운 여름 남부 알메리아로 가서 해수욕장 리조트에서 all-inclusive로 (조식, 중식, 석식, 간식, 음료까지 모두 포함된 상품) 가족 모두 원없이 먹고 쉬고 놀고, 무엇보다도 태어나서 일체의 걱정 근심 없이 누려본 인생 첫 휴가다운 휴가도 정말 좋았다.


그런가 하면 두 아들 녀석만 데리고 다녀 온 한여름의 스웨덴-스톡홀름 여행도 정말 좋았다. 남자들끼리만 가져본 시간이라고 대단히 특별할 건 없었지만, 그래도 엄마와 여동생 없이 여기저기 둘러보고 다녔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다. 코로나만 아니었음 해마다 이렇게 남자들끼리만의 추억을 쌓는 것도 좋다고 여길 정도였으니까. 스페인에서 음식으로 별 어려움 없이 보내온 터라 우린 어딜가든 다 잘 먹을거라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무던했던게 아니라 스페인 음식이 괜찮았던 거였다. 스웨덴 음식은 복병이었다. 좋게 말하면 들인 돈에 비해 맛이 좀 못 미쳤고, 나쁘게 말하면 편의점 핫도그가 제일 맛있었다.


한편, 막내 딸이 태어나기 전 두 아들만 있을 때 다녀본 스페인 곳곳의 여행도 나름 괜찮았다. 그런가 하면, 불행히도 사진으론 남겨진 게 거의 없지만, 슬로바키아에 살았을 때, 이웃 나라인 체코며,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의 주요 도시들을 주말마다 옆집 마실 가듯 당일치기로 다녀온 여행 또한 지금까지 나와 아내의 기억 속에 추억 가득한 순간으로 저장되어 있다. 아마 스페인으로 오지 않았다면, 지금도 미지근한 온천 어딘가에 자리잡고 막내와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도 여행 다니며 사진 찍는 걸 무척 좋아하셨는데, 그 영향인지 몰라도, 나도 가족들과 어디 다니는게 그저 좋다. 헌데 꾸준히 다녀본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행복했던' 여행을 꼽으려니 얼핏 떠오르는게 없었다. 좋은 것과 행복한 것에는 미묘한 간극이 있는데, 나는 오가는 길과 목적지에서 탈 안 나고, 안 싸우고, 사고 없이 돌아오면 그걸로도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여행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풍경이며 건축물을 보고, 새로운 곳이여서, 사진 찍을게 많아서 즐거운 거였지, 무언가 교감하고 차분하게 얘기를 나누며 보낸 기억이 의외로 적은 것 같다. 분명 좋았는데, 별다른 의미를 두지 못했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또는 그 때를 떠올려 볼 때 흐뭇하게 미소가 지어지는 걸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행복한 미소의 사진 한 장이 문득 떠올랐다. 카톡 프로필에 제일 첫 기록으로 남겨 있는 카카오스토리(아쉽게도 더는 사용하지 않는)의 짤막한 글과 사진, 여행 다녀온 소감을 지금처럼 바로 올린게 아니라 반 년 정도 묵혔다가 꺼내 보며 다음과 같이 썼다.


작년 가을경 Santiago de Compostela 에서 사랑하는 두 아들과 함께...
정말로 행복한 시간이었고
쉼이 되는 시간여행이었다.

밤하늘에 별이 셀 수 없을만큼 많아서
그 하나하나에 내 인생에 대한
감사의 제목을 충분히 달아도 될 만큼
무척이나 행복했다.

또 가고 싶네
쉼을 얻고 인생을 채우러...


너무 힘들어서 사는게 사는 것 같지 않았던 이 때, 어떻게 이런 글이 나올 수 있었을까. 가식은 아니었을까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어보고 기억도 떠올려 본다. 다행히, 가식은 아니었다. 첫 여름 휴가 나흘은 그나마 중간에 회사 전화를 받으며 악몽이 되었고, 그러다 겨울 연휴도 아닌, 무슨 생각에서인지 급히 짬내어 다녀온 여행. 차를 몰며 답답함을 어떻게든 풀고 싶었고, 그렇게 만난 북부 갈리시아의 산티아고는 내게 한국의 자연을 떠올리게 하는 푸른 숲과 초지가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었다. 


숙소는 사실상 그냥 집이었다. 갈리시아 특유의 돌로 만든 집. 숙소 내부는 벽지가 발라져 있거나 페인트 칠을 한게 아니라 커다란 돌들이 울퉁불퉁 자리잡고 있었다. 숙소 옆에는 주인 아저씨가 양을 키우셨다. 매애애애 정겨운 소리가 나서 거기 묵고 있는 순간만큼은 정말이지 상사의 압박이며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었다. 차 타고 나가 본 산티아고 시내의 모습도 그저 정겹고 좋았다.


거리를 쏘다니다 까미노 순례객들이 너나 없이 감흥에 젖는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나 또한 감격했고, 뜻 밖에도 백파이프 연주자가 보여서, 스페인 문화의 광활함에 다시 한 번 놀랬던 기억도 생생하다. 대성당 안을 휘이 둘러보며 나중에 다시 꼭 오고 싶었다. 어디를 봐도 돌 투성이 이지만, 모난 돌들이 없고, 죄 비바람에 깎이고 다듬어져 (갈리시아는 비가 정말 자주 오는 곳이다) 세월의 무게만을 느끼게 해 준 정감어린 오랜 지기 같았다. 한 자리에 오래도록 지켜준 돌들을 보고도 고마움 마저 느낀 걸 보면, 당시 내가 얼마나 마음이 방황하고 있던지가 떠오른다.

  

둘째 녀석 무등 태워주고 거리 여기저기에선 군밤 장수의 화로통이 보였다. 아내가 군밤을 사서 아이들에게 까주며 호호 불며 먹었다. 밤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거 먹은 것만으로도 애들은 이미 천국이다. 어디 더 둘러보고 부지런히 사진찍어 주고 할게 없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걸 보면서 우리도 숙소로 들어와 씻고, 숙소 내 식당에 예약한 시간에 맞춰 내려왔다.


손님은 우리 뿐이었다. 마치 특별한 날을 위해 따로 준비한 것만 같았다. 주인 아저씨는 어찌나 친절하셨는지, 울 아들의 자리로 와서 냅킨을 손수 목에 둘러 주시는데, 꼭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해 주는 모습 그대로였다. 바다 내음 가득한 식사의 맛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그 때 나는 직장에서의 불안불안하며 조였던 마음을 가족의 행복한 표정과 현지인의 진심 가득한 배려에 풀 수 있었다.


그 날 공장 하나 없는 시골의 밤 하늘에 수놓인 별빛과 달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봄철 바람에 흩날리는 꽃비처럼 그렇게 까만 밤 하늘에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노래 가사처럼, 드라마 대사처럼, 시간이 그대로 멈추어 주길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다음 날 아침 할아버지는 양떼를 데리고 나오셨고, 아이들은 처음보는 양떼 몰이에 얼른 식사를 마치고 밖으러 나가 만져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양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도저히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리 가면 저리 도망치고, 저리 따라가면 다시 이리 도망오니 아이들은 약이 오르지만, 그걸 보는 나는 시청자 비디오를 보는 거 마냥 웃겼다. 나중엔 그냥 멀찌감치서 구경만 하기로 했다. 그러다 아내가 사진에 담아줬다. 찰칵. 세상에.


난 지금도 이 사진이 내 인생 최고의 사진 중 하나로 꼽는다. 당시의 생활은 심적으로 너덜너덜 해진 운동화 밑창이었지만, 이 때만큼은 마법에라도 홀린듯 그걸 잊었다. 그래서 아이들도 나도 어둡지 않고 이렇게 밝은 표정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따뜻한 아이들을 보면 근심이 다 녹는다


왜 나는 이 때가 내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되는 것일까. 숨통을 조이던 직장에서 나온 후에는 정말 스트레스 하나 없이 완벽하게 즐긴 여행도 제법 있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정말 너무 힘들 때 찾아온 기회라서 그런 것일까. 일기를 쓴 것도 아니고, 나로선 오로지 지우고 싶었던 날들이라 정확한 기억을 고의로라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 나에게 이 사진은 그 모든 걸 잊게 만들어 주는 마법의 레드 썬! 과도 같은 사진이다. 토해내고만 싶었던 모든 과거가 이 사진 하나로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곱씹어 보게 한다.


코로나로 연일 갇혀 있다. 다시 나가고 싶다. 나가서 이 때처럼 아이들과 그냥 군밤 하나 까먹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다 가진 듯 행복하고, 가족과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따뜻한 저녁 한 끼만으로도 천국잔치에 들어 간 것 같은 그 기분을 다시금 느껴보고 싶다. 그 날의 여행은 죽기 일보 직전에 있던 나를 살린 강력한 심장박동기이자 절박한 인공호흡이었다. 이제는 다섯살배기 막내 딸과 함께 그 때의 숙소에 찾아가 푸근한 미소, 따스한 손길, 친절한 설명 가득했던 그 주인 아저씨를 다시 한 번 뵙고 싶다.


 

별 것 없는 숙소 돌계단에만 있어도 행복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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