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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Apr 26. 2021

행복의 의미를 생각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인간의 번영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삶의 목적은 행복이었다.

그러네 벤담의 행복이 쾌락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을 해도네 (그리스어로 쾌락)가 아닌

에우다이모니아이다.

직역하자면 '인간의 번영'이다.

고통을 최소화하고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과

무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행복은

어떠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행복이 상태를 의미한다면 

평생 잠만 자는 사람도 행복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행복은 구체적인 활동을 가리키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완벽한 행복이란 사유하는 활동의 일종이다"라고 말했다.


-<뉴 필라소퍼: 사유, 완벽한 행복을 위한 길>




Q. 행복의 의미

A. 한 때는 행복이 목적이었다. 그것도 일종의 강박처럼 여겨졌던 행복이었다. 신앙인으로서 행복해야만 된다라고 하는. 그래서 더 열심을 내게 만들고, 지친다 해도 그건 내가 게을러서, 노력을 덜해서, 미래를 바라볼 줄 몰라서 그런거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강한 동기부여를 '주입'해서 나의 의지를 강하게 쳐 올렸다. 단기간에 일시적인 성과를 올리기 위해 선수들이 근육 주사를 맞는 것처럼. 그래서 내 삶은 '해야 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 두 가지로 나뉘곤 했다. 


그래, 그땐 그랬다. 그래야 제대로 사는 거라 여겼고, 그래야지만 인간이 비로소 인간다운 구실을 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좀 더 살아보니, '도대체 왜' 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 때 그렇게 안 했으면 정말 큰 일 날 일이었을까. 규칙과 의무가 있어 사람으로서의 '구실'은 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중' 이라든지, '의미', 무엇보다도 궁극의 '행복'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무언가에 쓰임받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적인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은데, 내가 학교, 직장, 심지어 종교기관에서 조차, 그 가르침은 상당부분이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루는 인간 자체에 대한 배움과 성장 보다는,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기능적인 인간에 더 집중하고 부각시켰다. 의무와 봉사, 역할과 책임에 대한 당위적인 명제가 끊임없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 규격에 맞춰진 자만이 제대로 순기능을 하고, 사회와 공동체에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서 자리매김 하고 있다는 얘기를 주입받으며 자라왔다.

답정너와 같이 이미 암묵적이고도 일방적인 결론으로 끌어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간의 삶이 워낙에 00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식의 극을 달리는 환경이였기에, 이제라도 그 반대편으로도 한 번 생각해 보고, 억지로라도 익숙했던 담벼락을 허물고, 우물 안 개구리를 뛰어 넘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 때는 말이야'를 외치는 타인에게는 '그래, 그랬으니 지금 그럴 수 밖에 없겠구나' 하며 이해해 주더라도, 나 자신 마저 내 식대로 잘 되던 때를 고수해서 스스로를 한정 짓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살아보니, 세상에는 정말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이렇게 해야지만 행복합니다 라고 들이밀 수 있는 규격화된 잣대라는 게 가능한 일일까. 당연히 아니지, 더군다나 행복은 남의 시각, 객관이 아닌 철저히 나의 관점, 주관에 좌우되는 것인데. 왜 그렇게 우리에겐, 아니, 나에게는 나의 행복 마저 남의 시각으로 객관화 시키려는 말도 안 되는 작업을 시도해 보려 한 것이었을까.


표준화된 삶, 규격화된 세계, 예측가능한 인생. 당연히 필요하다.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한다며 굳이 혼돈의 세계, chaos world로 만들고 싶진 않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사는 환경을 획일화하거나 단순화 하고 싶지 않다. 기준을 만드는 순간, 그것에 못 미치는 자는 루저 loser 가 되는 것으로 나를 내몰고 싶지도, 타인을 판단하고 싶지도 않다. 제발이지 당신의 경험으로 내 인생이 걸친 옷을 두고 길네 짧네, 밝네 어둡네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내 삶은 당신에게 휘둘릴 이유도 없고, 그대에겐 그럴 권한도 없으므로.


그러하기에 인간의 번영을 고민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나 혼자만의 이기적인 만족을 위해 입 밖으로 쉽게 내뱉어 타인에게 비수를 찌르는 충.조.평.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행복은 나만의 잘 됨이 아닌 나와 너, 우리, 나아가 인간의 잘 됨을 염두하는 행복이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에서 교통 사고가 났다고 해 보자. 누구는 경상에 그쳤지만, 누군가는 중상을 입었고, 누군가는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알고보니 목숨을 잃은 자가 친구의 자식이고, 중상은 본인 자식이며, 경상은 본인이라면, 제일 먼저 나올 말이 무엇이겠는가. 자기 가족 목숨 살았다고 감사하기 전에, 자식 잃은 친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로 살아왔다. A가 불행하면, B는 A를 위로 하기 전에, B 자신을 그렇지 않아 다행이라고 한다. 아니면,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A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찾아낸다. (상상이 아니라, 실제 경험이다) 그 사람들이 나빠서 그런게 아니다. 위로와 공감의 결핍이, 나만 행복하면, 상대가 어찌되든 상관없어 하는 환경 속에 자라 왔기에, 그렇게 인간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쩌면, 그런 이유로, 행복을 이루는 구체적인 활동이란,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채 쏟아내는 무개념의 언어 토사물이 아니라, 고민과 생각을 거듭하는 것, 곧 사유思惟로 본 게 아닐까 한다. 그러려면 내가 바라지도 않는 언중유골을 자기 잘난 맛에 던지며 남을 찌르는 말이 아니라, 부모의 심정으로 보듬고, 친구의 마음으로 공감하는 말이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로이 생각하되 한 번은 여과해 보고, 다시 걸러내며 다각도로 보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야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너와 나는 에우다이모니아 εὐδαιμονία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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