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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y 13. 2021

글 쓸 때가 제일 좋아요

집중의 즐거움 + 사색의 생산성

내가 아는 행복한 사람들은 전부 다

스스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잘 해내는 사람들이다.


-에이브러햄 매슬로


The only happy people I know are

the ones who are working well at

something they consider important.


-Abraham Maslow




Q. 집중되고 생산성 올라가는 신나는 일을 소개해 주세요.


A. 집중이 되는 일은 일단 좋아하는 일이면 뭐든 바로 실현되는 것 같다. 올망졸망 키우는 세 아이들을 집중시키는 건 아주 간단하다. 금요일 만화(영화) 시청과 주말 휴대폰 게임, 딱 두 가지면 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의 90분과 휴대폰 게임 60분이 있는 동안 만큼은 나도 아내도 잠시나마 육아에서 벗어난다. 대신 이 두 활동만큼은 아이들 입장에서 세상 없어도 반드시 챙겨야 한다. 녀석들만 그러한가, 엄마와 아빠도 마찬가지다. 아내 보다 내가 더 적극적으로 챙겨주는데, 두 말할 필요 없이, 그 이유는 나의 편함을 위해서다, 전적으로.


자기들이 얘기 안 해도 당연히 영화 봐라, 게임 좀 해라 하며 자상하게(?) 챙겨줄 것임에도, 아이들은 행여나 아빠의 변덕이 튈까봐, 늘 금요일 저녁이 되면,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어떤 만화영화를 봐야 하는지, 본 걸 또 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봐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름의 상세한 설명을 들어줘야 한다. 중학생 오빠도 있지만 다섯살 배기 막내도 있기 때문에 사실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만은 않다. 그래도 양보해 주는 두 오빠 덕에 막내는 막내로서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면서도 고마워 한다.


한편, 주말 휴대폰 게임 한 시간은 두 아들이 필히 사수해야 할 성역이다. 시작 하기 전에 어떤 게임을 같이 시작하는지 신중히 의논하고 이후에 바꾸는 나름의 코스를 미리 정한다. 시작할 때는 몇 시 몇 분인지 정확히 언급한다. 게임 시간이 60분인지라 본인들이 알아서 계산할 테니 부모님은 절대 신뢰하시라는 일종의 신호다. 중간에 급히 화장실에 가면 그 1, 2분도 계산해서 뒷단에 챙긴다. 종료 10분을 남겨 두면서 부터는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한다는 압박감이라도 있는지, 서로 몇 분 남았는지를 보고하듯 챙긴다. 마침내 약속한 시간이 다다르면, 두말 않고 휴대폰에서 손을 뗀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점 하나만큼은 빠뜨리지 않고 칭찬해 준다.


게임할 때만큼은 단 1분 1초라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오직 게임 캐릭터의 업그레이드와 미션 클리어 공략에 정성을 들인다. 스페인에서 한국인 처음으로 프로 e-게이머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자연스레 들 정도다. 평소에는 무난하던 두 아들은 게임 전후로 게임별로 어느 시즌에 어떤 무료 아이템이 제공되는지부터 시작해, 그 날 게임 진행을 복기하며, 다음 번엔 필히 이기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선포까지, 아빠는 아는 캐릭터도 없고, 들어도 바로 끝나는 즉시 잊어 버림에도, 자상한 큰 아들은의캐릭터별, 아이템별 세세한 설명에 고개 끄덕이며 '응, 그래, 그렇구나' 한다.


세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날은 주말도 아닌 금요일이다. 파블로프의 실험 마냥 얘들은 금요일 아침부터 들떠 있고, 점심 때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하교 후 저녁이 되면, 식사 마친 후 본격적인 루틴을 시작함으로 자신의 세계에 푹 빠져 다른 일체의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집 애완조 삐꼬도 이 때만큼은 영락없는 찬밥이자 낙동갈 오리알 신세다.


그러나, 의외인 것은 영화가 끝나고, 게임이 종료된 후의 표정들이다. 여전히 만족과 행복이 가득한 때도 있지만, 반대로 영화가 일찍 끝나 아쉽고, 뭔가 기대했던 내용에서 좀 어긋나서 심드렁해지고, 게임이 잘 안 풀려서 속상하고, 자기보다 더 월등히 높은 점수를 가진 녀석이 나온 탓에 져서 분하고, 이 모든 걸 회복하려면 다시 일주일을 기다려야만 한다는 현실 앞에, 달리 만회할 방법이 없기에 아이들은 괜시리 심통을 부리기도 한다. 하긴, 차라리 그렇게 솔직한 게 아이들 답고 좋다. 그러니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하면 집중력은 확실하되 오늘의 주제처럼 생산성까지 올라가는 일을 연계해 보기란 무리인 싶다.




생산성의 영역으로 넘어가 본다. 생산성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경제 용어로써, 단위 노동을 들여 만든 생산물의 양이라든지, 토지, 자원, 노동력 따위 생산의 여러 요소들이 투입된 양과 그것으로써 이루어진 생산물 산출량의 비율이라고 정하고 있다. 간단히 보자면, 인풋 대비 아웃풋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생산성이라 하겠다.


이런 생산성은 단연 직장에서, 모든 업무에 적용이 된다. 직장인의 월급은 노력과 수고에 대한 보상이자, 희생한 시간에 대한 미안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때로는 스트레스 비용과 약값, 심지어 욕값 마저 포함된다.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한듯 해 내야 하는 조직의 분위기, 사내정치의 피곤함, 퇴근 이후에도 거듭 오는 업무 요청. 이 모든 것에는 사람을 인격체 이전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 누구도 돈 앞에 자유로울 자는 없지만, 그것으로 내 인생의 가치가 매겨진다는 건 얼마나 비인간적인 발상이겠는가.


그렇다면 직장 이외에 내가 정말 기분 좋게 생산성을 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우연히 디딘 발에서 천직을 만나건, 덕업일치를 이루건, 개인의 집중력에 업무의 생산성, 거기에 보람까지 더해진다면, 그는 인생이 누릴 수 있는 '궁극의 길'을 찾아낸 시대의 현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실은, 아까 전부터 한량인 필자가 그래 봤다고 호그와트의 헤르미온느 마냥 얼른 저요! 하며 대답하고 싶어 옴쭉달싹 못 하고 있었다.


즉, 천직도 찾았고(문화 가이드), 덕후로서 업도 이루었고(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여행), 일할 땐 누구보다도 집중력도 발휘하고(문화유산 및 역사 설명), 생산성도 나름 인정 받는 자리에까지 올라간데다(만족도 높은 고객후기), 인생의 즐거움까지 보태져(워라밸 실현), 뒤늦게나마 인생의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그랬었더랬는데, 아아.. 모든게 제로 베이스로 리셋 되었다.


다만, 이런 때 조차 감사의 싹을 틔울 수 있는 건 그 어느 때보다 고마운 분들, 따뜻한 분들, 마음 통하는 분들, 친구를 참 많이 만나 사람의 소중함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느끼고 있다는 점과, 그 무엇보다 그 분들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어 정말 좋다. 카톡의 메세지건, 인스타의 이모티콘 파티에 곁들여진 짤막한 글이건, 브런치에 글만으로 보다 길게 풀어내는 마음의 편지건 간에,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고, 공감을 주고 받음으로, 나 그렇게 이상한 사람 아니구나, 하는 안심도 받고, 나 잘 살고 있는 거구나 하는 자기 위로도 얻는다.


객관적 정보 보다는 내 생각과 감정, 그리고 감성을 여실히 담은 글들이라 어딘가에 활용할 방도는 딱히 없지만, 지나간 글을 다시 읽어 보며 글 쓰던 당시의 내 감정을 돌아보고, 좋았던 때는 감사함으로, 반대인 경우에는 그 보다 좀 더 성숙했는지 여부를 돌아보며, 나 자신을 점검할 수 있어 좋다. 그리고 남겨진 댓글과 답글에서 사람 냄새 풀풀 나는 걸 보며 글이 안겨주는 선물을 받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신나는 일 뭐 있을까? 놀면 뭐하니, 노는 것보다 더 신나는 건 역시 글쓰기지. 쓰고보니 문법적으론 맞지만 뭔가 상당히 어색하다. 이렇게 정정해야 맞을 것 같다. 글쓰기 자체가 내게는 신나는 일이고, 노는 일이다. 그 보다 더 좋은 건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로 마음 편히 만나기가 쉽지 않아졌기에 한동안은 마음이 많이 허했다.


그 허함을 글쓰기가 제법 채워주고 있다. 물론, 문장이 너무 뻑뻑하게 나오고, 감정의 연결도 순탄치 않고,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야 라며 결론 없는 맹탕 같은 본문에 스스로에게 화도 나는 등 문장이 쉬이 풀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그닥 볼 것도 없는 '나'라는 인간에 대해 뭐 볼게 있다고 이렇게, 안물안궁인 걸 미주알고주알 얘기하고 있는가 하고, 창피할 때도 제법 있다.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의 다른 생각과 의견을 주고 받을 때 스파크가 튀듯 신기한 세상을 들여다 보는 게 재미있다. 그런가 하면, 비슷한 사람은 몇 마디 오가는 대화 속에, 나와 성정이 참 많이도 닮았다는 느낌과 사실 속에 바로 모든 마음의 벽이 무너져서, 드럼 두들기는 듀라셀 토끼인형은 저리가라 싶게 대화하는 내내 격한 맞장구 추임새는 물론 요란떠는 박수에 숨 넘어가는 웃음까지 아낌없는 리액션을 선사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쓸 때도 내가 사랑하고 아끼고 마음 잘 통하는 그에게 말하듯 쓰곤 한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건 말이야, 이래서 저래서 다시 또 수다의 늪으로, 그렇지만 소재와 방향을 분명한 길로 들어가는 것이다. 때로는 혼자 쓰면서 킥킥대거나 오, 이거 괜찮게 봐 줄만 하겠는데 하는 경우도... 헉, 이건 독자에게, 내 정신상태를 의심케 하는 행위 같아서 취소해야 될 듯 싶다. 요지는, 글쓰기는 내게 비대면 시대에 있어 그 정도로 사는 낙을 일깨워 주는 보람 가득한 행위이자, 신나고 즐거운 타이핑 한 판이 된다는 점이다.




1년 전 유튜브 계정을 만들었을 당시, 덜덜 떠는 아마추어의 손길이지만, 피아노 연주를 녹화해서 짧은 감성글과 함께 올린 적이 있었다. 한 번 녹화를 제대로 하기까지 최소 50회의 시도가 있었고, 그 50회의 시도 전에는 또 최소 369번 정도의 연습이 있었다. (몰라, 암튼 나 자신도 황당할 정도로 3분 짜리 곡 하나를 두고 질려 버릴 정도로 많이 쳤음은 사실이다. 고장난 CD가 따로 없었을 정도로 무한 반복 재생에 가까운 소음을, 별 내색 없이 견뎌 준 가족과 옆집 할머니에게 미안하다. 정말 인내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애당초 나란 인간을 포기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영상을 업로드 한 후, 다시 들어보면 연주 실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음질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조악하기가 그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올려본 영상은 나 자신에게 무언가 만들었다 라는 상당한 성취감과 만족감을 주었다. 여기에 의미를 하나 더 부여하자, 모든 서투른 솜씨가 다르게 다가왔다.


이건 나와 내 가족,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 나를 떠올리게 만드는 마중물이자, 손때 잔뜩 묻은, 보잘 것 없지만, 세상에는 둘 도 없는 나만의 선물이 될 수 있겠다는 상상에서였다. 총 스물 세 편을 올려보고, 더는 가족과 이웃을 괴롭혀선 안 되겠다는 공리주의에 의거, 영상은 접었지만, 지금도 간혹 들어보면, 녹화하던 그 때의 그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그래, 그 부분, 거기, 자연스러웠어 이러면서...), 사랑 가득한 멜로디가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주며 감성을 채워주곤 한다.


집중력, 생산성, 즐거움. 이 세 가지는 결국, 반짝이는 일회성 흥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꾸준히 해 내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선택과 기준은 언제나 나에게 있다. 의미도 내가 부여한다. 첫 글에 바로 브런치 떡상에 오를 수 없고, 쪼렙 글쟁이가 대작가의 기운을 받을 수 없으며, 겨우 글감 하나 떠올리고서, '어멋, 이건 대박을 칠 문장이야, 써야 돼' 라며 베스트셀러의 스멜을 풍길 수 없다. 뿌리(꾸준한 글쓰기)가 없이 어쩌다 인기를 얻어 봤자 금방 시들고 잊혀지고 만다. 나무 뿌리의 끝은 단단하지 않다. 봄철 가지 끝의 새싹 보다도 더 부드럽고 연약하다. 그러나 그런 뿌리가 꾸준히 뻗어 나가 땅 속 수분을 빨아 올리며, 진액을 전해주는 통로가 되어, 아름드리의 기둥을 갖추게 하고, 무성한 나뭇잎으로 새들이 거닐게 만든다. 꾸준함은 꺾이고 부러지지 않을 유연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글쓰기는 내가 나에게 안겨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집중력의 능력을 키워 준다. 글쓰기는 분량에 상관없이, 남의 말 옮기기가 아닌, 내 생각을 오롯이 담아내면 담아낼 수록 풍성한 생산성과 보람으로 보답해 준다. 글쓰기는 혼자 있으면서도 혼자가 아닌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다. 특히, 종이에 펜으로 쓰는 글쓰기가 아닌, 브런치나 기타 플랫폼처럼 인터넷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의 글쓰기 작업은, 발행 또는 올림과 동시에 사람들과 교류하는 통로가 되고, 비대면 이지만 세상을 보는 창이 된다.


그렇게, 글쓰기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일 중에 하나가 된다. 만나면 만나서 나눈 즐거운 이야기가 다시 글감이 된다. 못 만나면 못 만났으니, 홀로 사색과 사유를 깊이 통찰력 있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 또한 다시 훌륭한 글감이 되어, 내 주름진 생각을 다림질 하듯, 스팀으로 따뜻하게 덥히고, 뜨거운 철판으로 고루고루 펴준다. 그렇게 쓰는 글은 쓰는 당시에도 행복이요, 쓴 이후에도 확대되는 교류로 행복을 넓혀 준다. 하다 보면 잘 하게 되고, 하다 보면 꾸준함, 성실의 힘이 붙는 것이다.




인간 욕구 5단계를 주창한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가 행복하다 여기는 사람들은, 객관화에 민감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뚜렷한 주관 하에 의미를 재발견하고 부여한 사람들이었다. 어찌보면 그들은 남의 시선과 평가에 두려워 하던 온실 속 화초에서 벗어나, 노지에서 차지만 더 없이 싱그런 새벽 이슬을 맞이하는 야생화로 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 온실 속 화초도 나였고, 지금 이슬 맞아가며 뿌리를 내리고자 안간힘을 쓰는 노지의 이름 모를 야생화, 아니, 훗날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아름드리 나무가 되려고 준비 중인 묘목 또한 역시 나이다. 행복의 길로 가고자 오늘도 꾸준히 글을 쓰며, 나이테를 키우고, 인내와 성실의 의미를 부여한다.  


내가 아는 행복한 사람들은 전부 다 스스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잘 해내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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