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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y 15. 2021

스페인의 하루는 쌓여갑니다

지나가기도 하고요

힘든 오늘 하루도 지나갔다. 

오늘도 잘 넘겼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사람들은 말하곤 해요.

하지만 하루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쌓여간다는 것 잊지 마세요.


-<어떤 하루> 신준모


Q. 오늘 어떤 하루를 쌓았나요? 쌓은 조각을 꺼내 주세요.


A. 스페인의 아침, 점심, 오후, 저녁, 그리고 밤


아침

아침에 막내가 갑자기 토를 했습니다. 미열도 났습니다. 놀래서 아이는 집에서 하루 쉬기로 하고, 둘째만 데려다 주고 옵니다. 아내와 커피 한 잔 하며 어제 읽은 브런치 글 일부를 기억나는대로 소개하고, 거기에 대한 저의 느낌을 전하고, 아내의 의견을 들으며 서로의 생각을 알아갑니다. 


점심

학교에 가서 둘째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가지덮밥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 식사 후 다시 둘째를 학교로 데려다 줍니다. 집 앞 공원 길가에서 제법 큰 네잎 클로버를 발견합니다. 요즘 들어 자주 보게 되는데, 벌써 다섯 번째 네잎 클로버 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큰 건 처음 봐서 오두방정을 떨며, 단체 카톡방에 올리며 모두의 대박을 기원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도 행운과 행복이 모두 전해지기를!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집니다



오후

그러다 브런치 작가님들이 모인 팀라이트 단체방에서 우연찮게 스무고개가 시작됩니다. 스페인에선 정말 시에스타를 하는지 묻던 이야기가, 스페인 오기 전 슬로바키아로 간 이유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한 작가님과의 대화가 다른 작가님들을 깨워 좀 더 얘기와 수다를 떱니다. 꺼내기 어려웠던 얘기를 관심있게 이어가는 질문 속에 하나, 둘 풀어 봅니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던 지난 일이, 공감하는 문우님들의 위로와 격려 속에 덮혀 갑니다. 그 당시 책상을 내려치고, 서류를 흩뿌리고, 노트북에 노트를 내던지다 자판이 떨어져 나가고, 막말을 내뱉던 장면과 상황은 여전히 뚜렷히 기억 속에 있지만, 무섭던 볼륨은 뮤트mute로 바뀝니다. 지워지지 않을 우울증이며 트라우마, 공황장애가 신뢰할 만한 분들과의 꺼냄과 나눔 속에서 힘을 잃어갑니다. 짓누르던 거대한 암석은 돌이 되고, 다시 쪼개져 자갈이 됩니다. 시간이 흐르고 마음 편히 나눌 좋은 분들과의 교류가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모래가 될 것임을 믿습니다.


둘째를 학교에서 데려 옵니다. 코로나 때문에 외출하고 오면 샤워실로 직행입니다. 그런데 보일러가 갑자기 고장입니다. 뜻밖의 찬물 샤워에 아이들은 괴성을 질러 대면서도, 서로 웃기다며 깔깔대고 좋아합니다. 안쓰러우면서도 고마움을 느낍니다. 얼른 집주인에게 연락해 수리공이 오길 기다립니다. 제가 좋아하는 가지 덮밥 점심에 이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짜장밥이 저녁입니다. 모처럼 새장에서 모란앵무 삐꼬를 풀어 줘 돌아다니게 합니다. 애완조가 아닌 관상조라 말은 안 통하지만, 녀석에게 자유를 잠시나마 허락해 줍니다.


아이들이 만화 영화를 보는 동안 아내와 애청하는 육아 영상, 금쪽같은 내새끼를 봅니다. 오 박사님의 문제 진단과 해결책은 언제나 의뢰인 가족을 향한 맞춤형이기에 볼 때마다 감동이 되고, 존경심이 일어납니다. 부모의 입장에선 언제까지나 숨기고 싶었던 사건이며 속마음이 모두의 앞에서 낱낱이 공개됩니다. 하지만 그건 힐난하거나 비평을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깨진 가정, 망가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고, 본인이 거쳐가야 할 단계입니다. 볼 때마다 언제나 지금의 아이들을 다시 보게 되고, 부부의 언어와 관계도 점검을 해 보게 됩니다. 


저녁

피아노를 칩니다. 피아노는 언제나 마음을 다스리고, 스트레스를 긍정적으로 풀어주는 상담가이자 치료제 입니다. 오늘도 며칠 전과 같은 레퍼토리로 죠지 윈스턴의 캐논을 시작으로 쇼팽의 환상즉흥곡, 그리고 베토벤의 비창 1악장을 연습합니다. 캐논은 작년 가을에서야 알았지만, 다른 두 곡은 25년도 더 된 오랜 벗입니다. 글쓰기와 달리 피아노를 치는 시간만큼은 모든 것에서 off 모드가 됩니다. 저만의 세계로 잠시 떠나 한껏 속을 풀고, 제 멋에 취하는 한량다운 놀음을 가져 봅니다. 언젠가 다시 여행업이 재개되면, 그 때처럼 스페인 일주의 마지막 방문지인 바르셀로나의 호텔에서,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손님들에게, 객실로 돌아가기 전 잠시 로비에 앉아 음료를 주문하고, 한 켠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에서 연주를 들려 드릴 겁니다. 예상치 못한 연주에 손님들은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를 풀고, 저는 피아노의 선율에 마음을 담아, 느리지만 포근하고 따사로운 여운을 남기고 싶습니다.



미국에 있는 친구와 통화를 합니다. 여긴 밤11시이지만 그곳은 오후 4시입니다. 몇 달 전 셋째 아들을 보아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막내의 사랑스런 미소를 보며 즐거운 하루를 사는 친구와 두런두런 얘기 속에, 서로를 격려하고 못 만나는 아쉬움을 달래 봅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의 일상과 사건과 감정을 오롯이 모아 브런치에 글로 기록합니다. 그렇게 오늘 스페인에서의 하루가 지나갑니다. 아니, 쌓여 갑니다. 지나가는 것도 맞고, 쌓여 가는 것도 맞습니다. 지나가는 것은 시간이고, 쌓여 가는 것은 마음입니다. 전자는 손님이지만, 후자는 주인입니다. 시간이란 손님이 지나가는 곳을 주인의 마음으로 채웁니다. 지나감이 있기에 비워지고 다시 채워집니다. 그 채움은 흐뭇한 기억이자, 따뜻한 회상이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At Gran Hotel Havana Barcelona Lobby 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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