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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y 11. 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을 사랑하는 이유

6년 가까이 살았던 슬로바키아를 떠나 스페인으로 온지 만 8년 6개월, 햇수로만 9년차를 맞이한다. 코비드로 문화 가이드로서의 삶이 모두 중단된 상태이지만, 그래도 분명 스페인의 햇살을 함께 즐기게 될 날이 올거라 믿으며 지금도 묵묵히 살아간다. 어느 나라에서건 여행으로 잠시 돌아보는 것과 일상의 터전으로 닦으며 살아가는 데는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건 어디가 더 낫다 아니다 말할 거리가 아니다. 선진국, 개도국, 후진국 이런 식으로 따지는 건 더 어리석은 일이다. 절대적인 지표도 별 의미가 없다. 좀 지내보니 그래도 편견 속에 알던 그 나라 사람들의 됨됨이나 생활 방식이 내가 지향하는 그것과 그래도 제법 맞는다, 어울린다, 적합하다 등의 부합한다면, 그 나라는 나에게 맞는 나라, 잠시 잠간 즐겼다 가는 걸 넘어서 내 인생의 둥지를 틀고 뿌리를 내려도 괜찮을 곳으로 보는게 맞을 것 같다.


스페인은 잘 알려진 서유럽권의 나라와는 상당한 차별성이 있다. 프랑스처럼 완전히 로망으로 가득찬 대상도 아니고, 독일이나 영국처럼 확실하게 선진국가의 면모를 띈 곳도 아니다. 스위스나 스웨덴, 노르웨이처럼 깔끔하지만 뒷통수를 부여잡을 정도의 비싼 물가에 매번 고심하는 곳도 아니다. 스페인은 유럽이면서도 만만하고, 투우, 플라멩코, 올리브, 가우디, 까미노 등으로 얼추 반은 알지만 (또는 아는 것 같지만), 나머지 반은 전혀 예상도 못한 미지의 세계이다. 스페인은 서유럽과 남유럽의 끝이며, 남으로는 아프리카를 마주하고 있고, 북으로는 피레네 산맥으로 막혀 있고, 동쪽으론 지중해가, 서쪽으론 대서양으로 둘러쳐저 있어, 반도이면서도 실상 섬과 같은 곳이다.


하지만, 섬이라기엔 또 영토가 우리나라의 다섯배나 되는 제법 큰 까닭에 명쾌하게 단언할 수 없는 복잡미묘 애매모호 함을 다 가졌다. 그렇다고 중국이나 인도, 미국처럼 가도가도 끝이 없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수도 마드리드에선 어디에서건 차로 대여섯 시간이면 까미노 순례의 종착지인 북서 지역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도,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숨결이 살아있는 북동쪽의 바르셀로나도, 알람브라의 추억으로 아스라이 감성을 건드리는 동남향 그라나다도 갈 수가 있다. 그야말로 살수록 더 가고 싶고, 한 번 갔어도 계절마다 다르게 유혹하는 도시마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싶어지는 나라이다.


발에 채이는 돌멩이며 바람에 휘날리는 낯선 꽃잎 조차 저들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텔링이 일상이 된 스페인의 매력은, 일찌감치 통일을 이루고 단일성 속에서 살아온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온 만큼, 다양함이 저들의 굴곡 많은 역사 속에 녹아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식당에서의 주문 하나 조차 기다림으로 시작해 식사가 나오기 까지 세월아 네월아 기다려야 하고, 병원이라도 갈라치면 안 그래도 느려터진 나라에서 코비드 때문에 더 번거롭고 복잡한 절차가 늘어나 속을 끓이게 만들며, 인터넷 신청에서 설치까지도 일주일 넘게 시간이 걸리지만, 해지는 더더욱이 어려워, 사용하지 않음에도 그야말로 몇 개월치 요금을 고스란히 물 정도로 속터지다 못해 홧병 나게 만드는 나라, 뭘 해도 속시원한 설명 보다는 변명으로 점철 되어 결론 없는 얘기만 반복하는 등등 뭐 하나 손쉽게 풀리는 일 없어, 스페인에서 당장이라도 짐 싸들고 떠나야 할 이유는 양 손 가득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 스페인을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그건 객관적인 지표가 아닌 순도 백의 경험치에서 기인한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고 가치관이다. 그렇기에, 당연한 말이겠지만, 내 경험이 스페인 전체를 대표할 순 없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스페인이 나와 내 가정에 주는 좋은 점 몇 가지만 짚어 본다.


1. 스페인에는 인간미가 넘친다

있다 없다 정도가 아니라 이 곳은 넘친다. 다른 곳이 없다는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어디에서건 수도와 지방에는 온도 차이가 있다. 여기도 마드리드 사람들은 깍쟁이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서울 토박이로 살아온 나에게 마드리드는 냉철한 도시 보다는 사람 사는 냄새가 있는 곳이다. 마드리드 외곽에 사는 지금은 더욱 인간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자연스러움이 있다.

친절함이 곳곳에 깃들어 있고, 자연스럽게 웃는 미소 속에 사람을 존중하는 모습이 배어 있음을 느낀다. 무슨 일을 당해도 일단은 같이 흥분하기 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켜주고 차분하게 응대하고 공감해 주려는 모습에서 비록 이방인임에도 차별 보다는 같은 인간으로서 따뜻함을 깊이 느끼게 된다. 그 점은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느끼는 바여서 아이들이 선생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신뢰하는 지가 표정만 봐도 짐작하게 만든다.


2. 스페인은 문화유산이 풍부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보유국 3위라는 글로벌 랭킹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나라는 어디에서건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국가처럼 기술의 최첨단을 달리며, 최신 과학문명을 누리기에는 거리가 있지만, 그 반대급부로 이 곳은 선조의 문화유산인 고색창연한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모르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알고 보면, 온갖 상징이 담겨져 있는 조각과 문양, 양식과 장식에서 동화의 세계로 떠나듯 끝없이 펼쳐지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수성을 풍성하게 일깨워 준다. 더욱 좋은 것은 이런 유산이 특정 도시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너른 땅에 고루 퍼져 있어 어디를 가든 이 곳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숨겨 있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유럽여행을 오는 한국인들마다 이들이 잘 사는 건 조상을 잘 만난 덕이라고 하는 경우가 제법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스페인은 나라를 되찾겠다고 종교를 앞세워 무려 800년 가까이 피린내 나는 전쟁을 치뤘다. 내전도 3년이나 겪었다. 그런 나라에서 세계문화유산 보유 3위국이라는 건 단순히 물려 받은 걸로만 때우고 사는게 아님을 보여준다. 수백 년의 전쟁 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하는 목숨을 건 노력이 있었고,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고, 그만큼의 비용을 투자했기에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스페인의 음식은 한국을 잊게 만든다

이게 대체 뭔 소리인가 싶을텐데, 이민자들은 다 안다. 아니, 해외 여행 사나흘만 다녀와 봐도 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은 다른 어떤 때 보다도 현지인들의 음식이 내게 안 맞을 때 정말 진리처럼 다가온다. 느끼하다, 그리고 짜다. 단 두 가지만으로 한국인들은 로컬 음식을 치부할 때가 너무나도 많은데, 그럼에도 스페인 음식은 토종 한국인인 내게 정말 잘 맞는다. 나 뿐만 아니라 이 곳에 오는 한국인 여행객들도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물론, 나와 내 가족은 한국인이기에 한식이 주식인 건 안비밀이다.

그렇지만, 외식의 기회가 있을 때, 단 한 번도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을까 고민하거나 망설여 본 적이 없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은 단지 욕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허기짐을 채우는 욕구를 넘어, 더 맛있는 걸 찾는 욕망으로까지 번지게 되는데, 스페인의 음식은 바게뜨 빵에 스페인 햄, 하몬을 넣는게 다인 빤 꼰 하몬 pan con jamón 과 같은 간식과 한입거리 핑거푸드인 따빠스 tapas나 삔쵸스 pinchos부터 시작해 가재와 온갖 해산물이 들어가 자자작하게 끓여내는 쌀요리 arroz caldoso con bogavante 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양념 없이 있는 주재료만으로도 훌륭한 한 상을 차려내, 먹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 뿐이랴. 분자요리며, 미슐랭 3스타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은 스페인식 상차림만으로도 충분히 행복을 맛보여준다. 벌써 쓰면서 멜론과 하몬을 곁들인 이름 그대로 melón  con jamón 과 그에 곁들이는 시원한 상그리아 sangría 한 모금이 떠오른다.


4. 스페인은 워라밸이 없다, 삶 자체가 여유다

가끔은 그 여유가 과해서 속이 터질 때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행동이 느릿한 한량인 나에게 스페인의 생활 양식은 안성맞춤이다. 약속 시간에 조금 늦어도 괜찮다. 더 늦어도 아무도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한다. "살다보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라는 게 스페인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깔린 정서다.

사서삼경을 읽어가며 선비의 기질을 뼛속까지 지닌 내가 비록 좀 굼뜬 행동이라 해도, 어떤 모임이든 약속이든 5분을 넘기는 지각은 한 적이 없다. 그래서 현지인들의 마인드 셋팅에 지금도 완전히 동화되긴 어렵다. 그렇지만 그들의 태도 덕분에, 적어도 인간의 삶은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 법, 그러니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마음을 보다 너그럽게 갖게 된 점은 고맙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가. 스페인의 주당 평균근무시간은 유럽 평균 36.5 에 비슷한 36.2시간이다. 이걸 보면서 말도 안 되는 숫자다 라고 생각할 분들이 제법 있을텐데, 그건 다 본인이 한국인이고, 한국회사에서 근무하기 때문이다. 외국에 있다 해도 한국회사에서 일하면 한국과 다를 게 딱히 없다. 나만 해도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당연히) 두 배를 훌쩍 뛰어넘었다. 여담이지만, 지난 십 년간의 해외근무경험은 따로 매거진을 발행하겠다.

여하간에, 우리나라의 워라밸이니 저녁이 있는 삶이니 하는 말은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에선 별 의미가 없는 말이다. 이미 그렇게 살아오고 있고, 이들이 일하는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생을 즐기기 위한 여행을 가기 위해서다. 절대로 그 반대인, 일을 하기 위해 먹고 사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답게 살려는 지금의 권리는 하루 아침에 된 일이 아니다.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연대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시에스타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이제 점차 더워져 가는 날씨 속에 시에스타는 게으름의 산물이 아니라, 하루를 건강하게 보내기 위한 지혜의 유산임을 알게 되었다. 삶의 여유가 비단 돈으로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는 철학적인 사고까지 확장된 건 덤으로 건진 혜택이었다.


5. 스페인의 날씨는 애당초 비교불가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자연을 무시하지 못한다. 자연환경은 그 나라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규정짓고, 언어의 어휘와 쓰는 습관까지 만들어 놓는다. 어렸을 때만 해도 봄철이면 황사에 대한 기사가 으레 있었을 뿐,지금처럼 미세먼지를 일상화해서 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인지 한국에서 온 분들은 유독 스페인만 보면 하늘을 보며 감탄을 하고, 버스 이동 중이건, 잠시 휴게소에서 쉴 때건, 도심 관광 중이건 할 거 없이 하늘 사진을 많이 담아간다. 하긴 9년째 살고 있는 나 역시 스페인의 하늘을 바라보며 지금도 감상에 젖곤 한다.

특히나 저녁 노을이 질 때면, 하늘색에서부터 연보라, 자줏빛, 진분홍, 감귤색 등이 어우러지는데 그런 하늘은 휴대폰으로는 아무리 담아보려 해도 안 나온다. 빌딩숲에 살았던 유년시절엔 원래 환경이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하지만 도심지라 해도 상당수 아파트 건물이 5층 이하이고,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유채꽃이며 밀밭이 끝없이 지평선 너머로 펼쳐진다. 그런 스페인의 땅을 달리다 보면, 탁 트인 대지와 그 위로 깨끗하고 맑은 하늘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불러 일으키고 삶에 만족감을 준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실제로 스페인의 연중 일조량은 유럽내 최고에 달한다. 연평균 300-320일 가량 일조량을 보이는데, 실제로 지금까지 지내면서 경험한 스페인의 날씨는 사람을 가만히 집에 앉아 있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어쩌면, 스페인은 작가들에게 최고이자 최악의 나라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되기에 최고임은 어디에서건 영감을 얻고 문화유산만큼이나 풍성한 글감이 널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최악임 또한 자명한 것은 도저히 이 축복 받은 화창한 날씨를 두고 타이핑을 하거나 펜대를 굴리기엔 너무도 견디기 힘든 곳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작가분들께선 한달살이로 오실려거든 처음부터 쓰는 건 넣어 두시고, 메모 정도로만 해 가시길. 스페인에서의 한달은 즐기기만으로도 모자랄테니.




원래는 스페인에 살아 가면서 이 나라와 이 국민에 갖는 불만을 상세히 적어 보려 했다. 그럼에도 결국 이 나라가 좋다는 건 몇 개로 퉁치고, 그냥 장점이 다 단점을 덮고도 남는다고 쓰고 싶었다. 그러려 했는데, 결국 쓰다 보니, 다시 이 나라에 대한 사랑이 지중해 파도 속 하얀 포말처럼 밀려온다. 한껏 격정적으로 무대를 휘어잡은 플라멩코 무용수가 아랑곳 않고 털어대는 머리끝 땀방울처럼, 다시금 이 나라를 다니며 만난 소박하고도 인간미 넘치는 이 곳 사람들과의 이야기, 스페인에 살면서 접하는 먹고 사는 이야기며 문화요소를 풀어가 보고 싶다. 그 주제의 시작이자 끝은 결국 사람이 될 것으로 생각해 보지만, 누가 알겠는가, 흥에 넘치는 사람들 덕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가지만, 그 또한 하나의 즐거운 여행이 되리라는 것을!


 

내가 사랑하는 스페인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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