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스페인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많겠지만, 역사 속의 스페인을 이해하는 대표적인 세 가지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전편에 언급했던) 로마, 종교 (기독교, 이슬람), 그리고 신항로 개척이 되겠다. 앞서 하나는 보았으니, 나머지 둘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살펴 보자.
3. 이슬람의 지배 vs 기독교의 반격 (본격적인 땅따먹기 I)
아프리카와 스페인은 지브롤터 해협 기준으로 최단거리 14km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바다 건너 육지가 너무도 선명히 보여서, 휴양지 섬으로 착각이 자연스레 들 정도이다. 그러나 마주할 현실은 섬이 아닐 뿐 아니라 유럽의 스페인과는 대륙도, 나라도, 인종도, 언어도 뭐 하나 같을 게 없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그렇다고 스페인에서 모로코로 갈 때, 지브롤터를 가는 경우는 드물다. 타리파 Tarifa 항구로 내려가는데, 이는 지브롤터는 스페인 땅이 아닌 영국령이기 때문이다.
지브롤터 Gibraltar,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북아프리카 영주, 무사Musa의 심복인 타리크Táriq 장군이 배를 타고 건너가 도착했다고 하여 '타리크의 산, Jab al-Tarik, جبل طارق'이란 아랍어에서 연유한 영국의 영토. 면적은 서울의 여의도 보다도 안 되는, 그야말로 눈꼽만한 땅뙈기 하나를 두고도, 몇 회에 걸쳐 썰을 풀어야 할만큼 어마무시한 스토리가 숨겨져 있지만, 이건 나중에 기회가 닿을 때 따로 설명해 두기로 하겠다. 역사에서 그 때 이랬다면 식으로 가정법을 떠올리는 것만큼 영양가 없는 일도 없지만, 만약 스페인에 이슬람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땅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은 스페인을 여행하는 내내 언제 떠올려봐도 재미난 소재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온 유럽의 생활이 기독교 아래 들어간 천 년의 중세 이야기로도 사전 두께의 책이 몇 권이 나와야 하는 마당에, 스페인은 급기야 이슬람까지 들어와 살림을 차렸다. 그것도 잠깐 머물다 간 게 아니라 무려 800년 가까이 지배하며 자기들의 언어며 풍습, 생활 양식 등 모든 것을 뿌리내렸다. 알라, 알자지라 등 아랍어의 정관사 '알'은 그대로 스페인어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나 스페인 곳곳의 지역명에 '알'로 시작하는 이름을 남겨두었다 - 알람브라, 알리칸테, 알칼라 데 에나레스 등. 그 뿐이랴. 유럽 기독인의 박해를 피해 망명한 유대인들 (별도로 세파르딤이라고 부른다) 까지 스페인에서 때로는 이슬람에 협조하고, 때로는 기독인의 눈칫밥을 먹어가며 악착같이 엉겨 붙어 살았다.
우리가 잘 아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당대에 유럽인들이 생각하던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얼마나 심한지 잘 나와 있다. 요즘 새삼 회자되고 있는 아시아 증오범죄를 보면, 이건 현대에 들어와 발생한 얼마 안 된 일이 아니라, 인류가 존재하던 때부터 늘상 있어왔던 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증오는 평등이 아닌 차별에서 기인한 것이다. 고대부터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고, 그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그 선을 넘은 자에게는 가차 없는 형벌이 가해지던 때를 상기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에 그걸 당연한 인간의 속성으로 받아들이자는 말이 아니라, 역으로 각고의 노력을 다해, 끊임없이 교육하고, 계몽하고, 인지시키고, 수시로 상기시켜서, 증오 자체가 범죄이고, 차별 자체가 인간성을 저버리는 행위라는 걸 자각시켜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 사례만 보더라도, 스페인은 가히 역사의 천일야화급에 해당되지 않을까. 가이드를 하며 설명하다 보면 늘 이 지점에서 고민이 된다. 어디서부터 끌어와서 시작해야 할지, 어디까지 연계해서 끌고 나갈지를 두고 말이다. 마이크를 잡은 손은 하나라도 더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에, 두 손 모아 기도하듯 간절한 자세까지 나오지만, 듣는 손님들은 그간 시차에 맞서랴, 행군 하듯 종일 걸으랴, 한편으론 방전된 몸을 충전하기 위해, 또 한편으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잠시 눈깜짝 했을 뿐인데, 그 사이 수백 킬로를 이동하는 신공을 발휘하기도 한다.
무엇이든 명암이 존재하는 법이다. 절대적 선이 없듯 악도 없다. 스페인은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동안, 수학과 과학 등의 기초지식과 건축, 장식 등의 응용기술 양측에 찬란한 꽃을 피워, 스페인의 경제와 문화를 크게 발전시킨다. 안달루시아의 신부, 꼬르도바는 10세기 당시 유럽에서 가장 정점에 있던 찬란한 왕국이었다.
한편, 북쪽 아스투리아스로 쫓겨난 서고트 세력을 그 곳에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데, 이를 국토회복운동, 일명Reconquista 레꼰끼스따 (레콩키스타) 라고 한다. 어렸을 적 보던 TV 만화영화 <메칸더 V>의 악당들 이름이 콩키스타 군단이었는데, 그게 바로 중남미에 진출한 스페인 정복자들Conquistadores을 뜻하던 말이었다. 아, 스페인이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 있었을 줄이야. 아, 메칸더 V를 당최 모를 분들을 위해 링크를 남긴다. 메칸더 로보
이후 718년 뺄라요/팰라요(스페인어 Pelayo 입니다. 우리말로 생각하심 안 돼요)를 중심으로 코바동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이슬람과 기독교는 종교가 곧 민족이며 왕국으로 판이 짜여져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대표적인 기독교 (카톨릭) 왕국이 바로 카스티야, 레온, 나바라, 아라곤이 된다. 이 네 왕국은 현재 스페인 국기며 지명에도 그대로 남아 있기에 한 번 기억을 해 두면 스페인 여행을 하는 동안 두고두고 유용하게 쓰는 키워드가 된다. 카톨릭 왕국들이 얼마나 이슬람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지, 온 유럽이 참전했던 십자군 전쟁 (1095-1492) 에서조차 스페인은 교황으로부터 참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제를 받을 정도였다.
밀고 밀리는 전투 끝에 1212년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주름잡던 이슬람은 기세가 꺾이게 된다. 이에 급물살을 타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카톨릭 왕국들의 활약이 펼쳐진다. 그러던 중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는 1살 차이의 연상 연하 부부가 됨으로 연합카톨릭 왕국을 형성하고, 교황으로부터 카톨릭 여왕과 카톨릭 왕 이라는 별칭까지 받으며, 이슬람 잔존 세력을 토벌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마침내 1492년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의 나사리 왕조를 몰아내며 지난했던 그들의 국토 회복 운동을 완성한다. 또한 같은 해에 콜럼버스는 (그들의 눈에 보기에 신대륙이라 여기는) 아메리카에 발을 내딛음으로 신항로 개척, 일명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스페인 신항로 개척의 선두주자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콜럼버스는 이태리 출신이고, 마젤란은 포르투갈 사람이었다. 둘 다 스페인 가문과는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그럼에도 스페인은 출신을 가리지 않고 적극 기용해서 서쪽 땅끝 별볼일 없던 나라를 단숨에 역전시켜 해상왕국으로의 기반을 닦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당대에 스페인 국민과 대신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온 몸에 받은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서건 잘 나간다 싶으면 주위에서 시기와 질투가 존재하는 법이다. 끊임없는 음모, 모해, 배반에 시달렸고, 결국 두 인물의 끝 역시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나는 문책과 질책 속에 삶을 마감했고, 다른 하나는 전투 중 사망했다. 게다가 현대의 평가도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시각, 둘 다 막상막하일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 누구도 가 보지 않아 막막했던 두려움과 온갖 현실적인 이해타산 속에 주저하기만 하던 동시대인들에게, 과감하게 나선 그들의 역량은 전해주는 감흥이 크다. 아울러 이방인에게도 나름의 기회를 제공한 스페인의 정책도, 고정관념을 깨지 못하는 자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귀하다 하겠다.
4. 황금시대 vs 파산시대 (본격적인 땅따먹기 II)
콜럼버스가 첫 발을 뗀 이후 내부 정리가 된 스페인은 본격적으로 남의 땅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며, 정복자들을 보내 중남미의 문명과 문화를 무참히 파괴하고, 수많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예기치 못한 전염병으로 몰살 시키거나, 노예로 끌고 오는 등 인간으로서 하면 안 되는 짓을 자행한다. 그렇게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린 결과, 중남미 대부분뿐 아니라 북미도 1/3에 가까운 영토를 얻고, 심지어 태평양까지 건너와 필리핀 (나라 이름이 국왕 펠리페에서 비롯되었다) 등을 지배하며 감당치 못할 엄청난 양의 금, 은, 보석을 들여온다.
이른바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을 16세기에 이미 이루었으니, 익히 아는 19세기의 영국보다 수 세기에 앞서 이룩하며, 황금 세기의 서막을 연 것이다. 공고라, 에레라, 몰리나 (아무말 대잔치 아닙니다) 등 우리로서는 태어나 난생 처음 들어보는 문인들도 있지만, 거의 유일하게 알려진 작품 <돈 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 Miguel Cervantes de Saavedra가 바로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하는 시기이기도 한다.
개개인의 이웃이야 사이 좋은 이웃사촌이 되지만, 나라의 입장은 서로 대립의 관계에 있는 경우가 잦은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딱 그랬다. 서로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나중에는 그 중재를 교황에게까지 맡기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스페인은 또한 카톨릭-개신교 간의 기독교 내 종교전쟁에서 절대적인 카톨릭 수호자를 자처하며 참전하고, 무적함대라 불리는 해군을 육성, 오스만 투르크와의 레판토 전투도 치룬다. 그렇게 해서 펠리페 2세 당시 최대의 황금기를 맞지만, 1588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임명한 해적 드레이크에게 패한 후 스페인은 몰락하기 시작한다.
그 뿐인가. 중남미 식민지에서 원주민들을 착취해 얻은 온갖 사치품과 식품들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스페인의 산업은 퇴보를 거듭하고, 지독한 인플레에 시달리며,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스페인이 어렵게 가져온 은을 무역으로 손쉽게 자국내 금고로 귀속시키는 수완을 발휘했다. 재주는 곰이 넘는 사이 돈은 계산 빠른 놈이 다 챙겨간 것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대영토를 소유하고 그들로부터 은과 금이 끊임없이 들어옴에도, 펠리페 2세의 빚은 줄어들 줄 몰라서, 40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무려 네 번이나 국가 파산 신고를 내는 세계 유례없는 신기록을 세운다.
자신도 스페인에 살면서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 아닌가 할 수도 있겠지만, 애당초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거래라든지, 인도주의적인 교역 방식과는 무관하게 살아온 자들이니 만큼, 몇 번이고 오욕으로 점철된 과거를 반성하는 쓰디 쓴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남에게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어 세운 부는, 몇 곱절 더 처절하게 무너지기 마련이 아닐까 하는, 인과응보 마저 떠올려 보게 만드는 스페인의 자부심 가득한 황금시대와 빛좋은 개살구 꼴이 되고 만 파산시대였다고 본다.
1700년에 들어서자 스페인이 왕실은 이제 유럽에 방귀깨나 뀌는 이들은 다 숟가락 하나씩 얹어 보고 싶은 자리가 되었다. 스페인 왕실 문제에 사돈에 팔촌까지 핏줄을 찾아나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 싶음,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어 왕위 계승 전쟁을 치루었다. 그 결과 스페인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에서 태양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를 들여와 펠리페 5세로 옹립하게 된다. 한편, 1808년 프랑스 독재자 나폴레옹이 침략해 자신의 형을 왕으로 앉혀 스페인의 역사에 치욕을 안겨 주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스페인은 중남미 국가들의 독립, 내부 정치적인 분열과 혼란, 공화국과 왕정복고의 계속되는 갈등, 미국과의 전쟁 등으로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5. 스페인 현대사
스페인의 현대사는 우리나라와 묘하게 닮은 꼴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일단, 첫 공화정 성립 이후 왕정복고, 입헌군주제, 공화정 재수립, 거기에 군사 독재 정치까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거쳐갔다. 정치적 불안함이 이 나라를 지탱해 주는 힘인가 하는 어불성설의 생각이 들 정도로, 온갖 험한 사건을 다 겪던 스페인은, 결국 1936년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로 3년간 극심한 내전을 치루게 되고, 이후 군부독재 시대를 무려 36년간 경험하게 된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을 받들어, 그가 생전에 지목했던 부르봉 왕가의 후손 후안 카를로스를 왕으로 즉위시킨다. 하루 아침에 왕이 된 그는 새 헌법을 선포함으로 얼어붙었던 스페인 민주주의의 문을 다시 열었다.
독재자의 등장 덕에 급격한 민주화를 이루었음은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 남다른 결단과 추진력으로 온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국왕 조차, 나이 들자 연이은 추문이 터져, 한 때 높았던 인기만큼 끝없는 실망감을 안기며 왕실의 존폐위기까지 갈 정도로 추락하고 만다. 왕의 혈통을 타고 뼈대부터 달랐을 국민 영웅의 성장과 몰락을 보며,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인가 하는 회의감과 함께, 지극히 평범한 나 또한 예외가 아닐테니, 평생을 두고 자아성찰을 과업으로 삼아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아버지의 퇴임에 이어 아들 펠리페 왕자가 2014년 펠리페 6세로 스페인의 국왕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 천년 역사의 뒤안길에서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우뚝 건재해 있는 나라, 또는 더부살이와 같았던 운명에서 투쟁해 당당히 자신들의 터전을 일궈낸 나라,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유를 위해 피와 땀을 아끼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달리 말해, 국가를 이루고 발전시키며 영속시키는 일의 근간에는 모두 '자유'를 향한 갈망이 컸다는 점이다. 하여, 인류의 역사란, 태생, 성장, 발전, 몰락의 길을 순환하는, 한 인간의 일생이 확장된 개념인 동시에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선조들이 이루어 놓은 소중한 자유에 대한 가치를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창조물인 돈 키호테가 종자인 산초에게 전한 말을 통해 역설했다. 인생의 가치란 무엇인지 저마다 생각의 자유가 있다. 그리고 어디에 자신이 추구하는 최고이자 최선의 가치를 둘 지 또한 자신의 자유이다. 그러나, 편안과 안식에만 있을 인생이란 무덤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흔들린다는 것, 때때로 낙심한다는 것, 슬럼프에 빠지고, 일이 안 풀려 한숨이 늘어나는 것 또한 내가 이 땅에서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모험은 두렵지만 짜릿한 즐거움 역시 동반한다. 각자의 생 앞에 펼쳐진 모험에 과감히 발을 내딛고, 자신의 역사를 멋지고 당당하게 써 나가기를 바란다.
La libertad, Sancho, es uno de los más preciosos dones que a los hombres dieron los cielos;
con ella no pueden igualarse los tesoros que encierran la tierra y el mar:
por la libertad, así con por la honra, se puede y debe aventurar la vida.
자유란, 산초여, 하늘이 인간에게 준 가장 소중한 선물 중 하나이지.
땅과 바다의 어떤 보물도 자유와 맞먹을 정도의 가치는 없어.
자유를 위해, 또한 명예를 위해, 인생이란 모험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이야.
Don Quijote y Sancho Panza, Alcalá de Henares 세르반테스의 고향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 있는 돈키호테와 산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