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문아카데미의 서양미술사 수업을 들은 지 4주 차가 되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비대면으로 진행되는데 덕분에 여러 도시에서, 심지어 내 경우는 해외에서 듣고 있으니 어쩌면 좋은 일이 되었다. 강의실에 있었다면 다들 강사님만 바라보느라 서로 얼굴도 잘 몰랐을 텐데 비디오를 켜놓고 zoom으로 참여하니 모두를 바라보게 되어 오히려 더 눈에 익는다. 내가 웃을 때 같이 웃는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도 이 부분에서 나처럼 웃음이 나는 사람이구나 새삼 공감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이번 주 수업노트는 책(서양미술사, E. H. 곰브리치) 내용보다도 수업시간에 나누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써보려 한다.
미술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개인적인 감정은 내려놓고 되도록 다양하게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미술은 감상하는 것이고 감상은 개인적인 것인데 그걸 내려놓으라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런데 미술을 볼 때 너무 개인적인 취향이나 감정만을 앞세우면 시각이 좁아지고 결과적으로는 미술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만다.
책과 강의에서는 다른 그림을 예시로 들었지만 나는 더 극단적으로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로 설명하고 싶다.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19-1823> 프란시스코 데 고야
누가 봐도 끔찍한 그림이다. 나는 이 그림 앞에서 고개를 돌리거나 얼굴을 찡그리던 이들을 많이 보았다. 분명 취향이 아니었을 것이고 별로 유쾌하지 않은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어둠을 배경으로 광기로 가득 찬 눈을 부릅뜬 이가 이미 몸의 일부가 사라져 피를 흘리고 있는 육신을 움켜쥐고 있다. 심지어 그게 저 미친 자의 아들이라고 아주 친절히 제목에서 알려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름다운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이 그림이 안 좋은 그림은 아니다. 고야가 이런 어두운 페인팅을 하게 되었던 개인적, 시대적 배경과 그의 다른 예술 행적들 그리고 지지했던 신념들을 알게 된다면 고야의 고뇌에 전율을 일으키는 경험을 하게 될지 모른다. 어떤 그림이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무조건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또 다른 하나는 분명한 언어로 묘사하되 역시 개인적인 감정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제목을 비롯해 아무런 배경지식을 갖지 않은 사람이 위 그림을 묘사한다면 어떻게 이야기할까?
눈이 너무 무서워요. / 징그러워요. / 잔인해요.
이건 그림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늘어놓는 것이다. 이는 굉장히 단편적인 감상법이다. 이보다는 찬찬히, 눈에 보이는 걸 하나씩 묘사해보는 것이다.
배경이 검고 인물의 색감도 어두운데 비해 가운데 붉은 피의 색감이 두드러진다. 잡아 먹히는 이는 잡아먹는 이보다 훨씬 작은 몸집이다. 그러니 어린 아이나 약자일 것이다. 추켜올린 눈썹과 부릅뜬 눈에서 느껴지는 강하게 긴장된 안면근육, 바람이 불 것 같지 않은 배경에서 휘날리는 머리칼, 손톱이 파고들도록 잡아 먹히는 이를 움켜 잡고 있는 손에서 격정적인 광기가 보인다.
개인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을 걷어내고 미술의 권위에 대한 이유 없는 두려움과 생경함만 극복해 낸다면 미술을 모르고 아무 배경지식이 없는 이도 한 작품을 보고 이런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여기까지가 배경지식 없이 어떤 작품을 처음 볼 때 읽을 수 있는 것들이다. 작품의 가치나 의도, 시대적 의의 등은 절대 보기만 해서는 알 수 없다. 설령 감상자가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학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강사님께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예로 이야기해주었다.
종종 미술관을 지인들과 가게 되면 지인들이 자주 강사님께 이렇게 묻는단다.
이 그림은 좋은 그림인가요?
강사님은 미술학 박사이니 모든 그림을 척 보면 바로 좋은 작품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묻는 질문이다. 그러나 처음 본 한 편의 그림만으로는 그런 평가를 할 수 없다. 가치 평가를 위해선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동시대 다른 작가의 작품들은 물론 그려진 시대나 배경 등 훨씬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이를 배제한 채 무조건 한 그림만 보고 좋은지 아닌지 알려달라는 건 마치 음악의 딱 한 구절만 들려주면서 좋은 곡인지 묻는 것과 마찬가지라 했다. 설사 그 구절 자체는 좋더라도 다른 구절이 엉망이라 전체적으로는 별로일 수도 있고, 알고 보니 어느 특정 시대에 유행하던 흔한 멜로디를 따라한 곡일 수도 있다. 그러니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 할지라도 한 그림을 보자마자 그 가치를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술을 감상하는 건 와인을 감상하는 법과 참 닮았다. 와인을 좋아하고 조금이나마 배운 게 있다 보니 수업을 듣다 보면 가끔 자연스레 와인이 떠오른다. 여러 와인들을 마시다 보면 당연히 편애하는 품종들이 생긴다. 심지어 같은 나라 같은 품종이라 할지라도 아주 구체적으로 특정지역의 특정 와이너리를 좋아하기도 한다. 스페인의 많은 지역에서 템프라니요 품종을 재배해 레드와인을 만들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리베라 데 두에로 지역의 템프라니요로 만든 와인을 좋아하고 또 그중에서 아르수아가라는 와이너리의 와인을 가장 자주 마신다. 하지만 이는 개인적인 선호일 뿐, 진짜 좋아하는 건 와인 바로 그 자체이다. 그러기에 허락하는 한 더 다양한 품종의 새로운 와인을 늘 맛보고 싶다.
그런데 만약 내가 아르수아가 와인을 좋아하다 해서 이것만 평생 마신다면 다른 수많은 와인을 즐기고 마시는 즐거움을 놓쳐버리는 꼴이 될 것이다. 또한 설사 100톤(?)의 와인을 마셨다 한들, 저 와인만 주야장천 마신 거라면 나는 와인에 대해서 전혀 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진정 미술을 즐기고 싶다면 개인적인 취향과 편견은 접어두고 다양한 작품을 보려는 노력 해야 한다.
묘사에서도 역시 와인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와인 맛이 어떠냐고 묻는 질문에 누군가가 이런 묘사를 한다면 어떨까?
아, 이 와인은 마치 어린 시절 시골 외갓집에서 느끼곤 했던 따사로운 늦여름 오후 햇살을 떠올리게 해요. 참 포근한 기억이지요.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래서 와인이 어떻다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묘사이다.
와인을 묘사하고 표현하려면 먼저 눈으로 보아야 한다. 같은 화이트 와인이라도 초록빛이 도는 와인이 있고 레몬빛이 도는 와인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 더 진한 황금빛이 도는 와인이 있다. 객관적인 색을 볼 수 있도록 하얀 불빛 아래 하얀 테이블보에 비추어 색을 찾아내야 한다. 그다음 향을 맡아야 한다. 향을 표현할 때도 정확한 언어로 최대한 모두가 알고 있음 직한 향을 비유해 상세히 표현해야 한다. 갓 깎은 풀내음이라든지, 사과향인데 덜 익은 풋사과향인지 빨갛게 익은 사과향인지, 복숭아 향이라면 딱딱한 복숭아 향인지 복숭아 통조림에 가까운 달큼한 향인지 말이다.
마지막으로 맛을 본 뒤 산미를 말한다면 그냥 '음 새콤한데?' 이런 표현을 할 게 아니라, 와인을 마신 뒤에 입에 침이 고이는 시간을 계산해보고 이를 기준으로 그 정도를 말해야 한다. 물론 이런 색과 향과 맛을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선 보다 많은 와인을 보고 느끼고 마셔 보아야 한다. 미술감상처럼 말이다.
실은 잘못된 감상과 묘사는 매우 일상적이다. 나도 자주 하는 실수이지만 우리는 사람의 단면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 때로는 그 단면을 보고 평가하는 다른 이의 말만 듣고 타인을 짐작해버리기도 한다. 그런 편견이 가득 씐 눈으로 바라본 어떤 사람은 고야의 그림처럼 불쾌한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런 시선으로는 바라본다면 고야의 그림 앞에서 고개를 돌려 버렸던 것처럼 그 사람의 다른 가치는 외면해 버린 채 고개를 돌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단 한 폭의 그림이 아니다. 일생을 거쳐 만들어지고 있는 컬렉션이다.
세상 역시 그렇다. 불쾌한 단면 앞에서도 외면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마주하는 일, 그 안에 담긴 또 다른 가치를 탐구해보는 일, 내 눈에 씐 편견을 걷어 내고 남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으며 제대로 세상을 바로 보는 일, 그게 미술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술 그 자체를 알고 싶은 게 아니다. 그걸 배움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법과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기대하는 것이다. 아직 답은 한참 멀리 있다. 하지만 4주 차를 돌고 나니, 조금은 더 가까워진 듯도 하다. 잊고 싶지 않아 기록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