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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Jun 03. 2021

밤 9시에 저녁 먹는 스페인, 잠은 대체 언제 자?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며칠 전 누군가에게 스페인에서는 저녁식사를 밤 9시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수십 번은 들었던, 나 역시 여러 번 자문했던 질문이 돌아왔다.


"그럼 잠잘 때 괜찮나요?"


자매품으로는 '그럼 잠은 언제 자냐' '그럼 살 안 찌냐' '그럼 소화가 되냐' 이런 질문들도 있다. 다 차치하고, 아니 대체 왜 스페인 사람들은 밤 9시가 되어야 밥을 먹을까?




스페인의 이런 독특한 식사 시간 때문에 가장 고통받는 건 누가 뭐래도 스페인에 온 외국인들이다. 여행 중에 식당을 가려고 보니 점심 오픈이 2시이고 저녁 오픈이 9시이다. 그나마 요즘은 조금 당겨져서 1시 반이나 8시 반에 오픈해주는 식당이 있기도 하다. 나 역시 처음 스페인에 와 스페인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할 때 낮 2시 반, 저녁 9시 반이 되도록 밥을 주지 않아 배고픔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런 식사 시간은 이웃나라 포르투갈을 비롯해 유럽 어디에도 없고 같은 언어권인 중남미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실은 스페인 사람들은 잘못이 없다.


잘못된 건 사람들이 아니라 시계이다.



스페인은 유럽 대륙의 서쪽에서 포르투갈과 국경을 맞대고 위치해 있다. 두 국가의 수도 마드리드와 리스본 간 거리는 차로 6시간 정도이며 가장 가까운 포르투갈 국경 도시까지는 마드리드에서 4시간이면 간다. 그런데 포르투갈 시계는 스페인보다 1시간이 느리다. 스페인이 낮 2시일 때 포르투갈은 아직 1시이다. 반면 마드리드에서 쉬지 않고 가도 육로로 꼬박 24시간이 걸리는 독일 베를린은 스페인과 시간이 같다. 실제 스페인에 떠있는 해 위치에 따른 시간은 포르투갈 시간에 더 가깝기 때문에 포르투갈이 낮 1시일 때 스페인도 1시이어야 하지만 스페인 시계는 엉뚱하게 독일과 같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럽 지도상으로 보면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간 거리 차이가 더 극명히 비교된다 (출처: 자료 내 명시)


그래서 사실 여기 사람들이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상 낮 2시에 점심을 먹는다 해도 자연의 시간으로는 1시 즈음, 다른 국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간에 밥을 먹는 셈이 된다.




문제는 스페인이 하루를 여는 시간은 다른 국가와 같다는 것이다. 보통 9시면 출근을 하고, 그러기 위해선 7시경에는 일어나 준비를 하고 아침을 먹는다. 이후 점심시간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중간에 아침 간식을 먹는다. 저녁식사 시간이 늦으니 오후 간식도 먹는다. 특히 성장기 아이들에게는 필수이다. 하교하는 아이들의 손에 보면 비스킷이나 바게트 샌드위치가 들려 있는데 바로 오후 간식이다. 처음에는 이것도 참 이상했더랬다.


 "아니 오후 6시에 배가 고프면 그냥 저녁을 먹으면 되지 왜 간식을 먹는담?"


물론 살다 보니 이해가 된다. 스페인의 오후 6시 풍경은 여전히 너무나 한낮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스페인 시계가 요 모양이 되었을까? 스페인 시간이 독일 시간과 같아진 건 프랑코 독재정권이 들어섰던 때부터이다.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를 통해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프랑코와 나치 독일군은 일종의 협력 관계에 있었다. 이런 독일의 비위를 맞추고 양국 간 행정적 편의를 위해 스페인 시간을 독일 시간과 똑같이 정했다는 게 지배적 의견이다. 때문에 프랑코를 비난하는 세력은 지금도 꾸준히 스페인 시간을 재조정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기도 한다.


저녁을 늦게 먹는 또 다른 이유는 스페인에 팽배했던 투잡 문화 때문이다.



스페인이 20세기 초 공화정 수립을 둘러싼 반복되는 정치싸움과 내전을 치르는 동안 시민들은 지독한 가난을 경험해야 했다. 그래서 지난 세기 스페인에서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한 가지 이상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침에는 은행원으로 출근했다가 오후에는 식당 종업원이 되는 식이다. 이게 가능한 게 스페인은 오후 3시경에 퇴근하는 사무직들이 많다. 단순업무거나 작은 회사라 아예 반일근무로 계약하는 경우도 있고, 종일근무 계약이어도 대부분 회사가 매주 금요일과 하계기간(7~8월)에는 인텐시브 근무(8~15시) 근무 후 퇴근한다. 따라서 오후 알바까지 마치고 밥을 먹어야 하니 저녁시간이 자꾸 늦춰졌다는 의견이다.


현재도 스페인에서는  투잡, 쓰리잡을 갖는 게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반면 청년실업 문제로 투잡은 커녕 알바자리도 못 얻는 니니족(Nini-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닌 청년을 일컫는 21세기 스페인어 신조어)이 있기도 하다.




그럼 스페인 사람들은 밤 9시에 저녁을 먹고 언제 잘까? 스페인 사람들이라고 하루가 30시간인 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대답은 '조금 잔다'이다. 스페인 사람들의 평균 수면시간은 자료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약 하루 7시간 정도이다. 유럽인 치고 조금 자는 거지 사실 바쁜 한국사회에 비하면 아주 조금 자는 건 또 아닌 것 같다. 또한 이웃 유럽 국가 사람들이 밤 11시경에 침대로 가는 반면, 스페인은 평균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든다고 유럽 통계조사 기관(eurostat)은 밝힌다.


잠은 둘째치고 소화는 될까? 맨날 야식을 먹는 셈인데 살은 안 찌나? 이 역시 조사 방법이나 기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나 스페인 사람들이 특별히 다른 국가 사람들에 비해 비만율이 월등하진 않다.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이곳 사람들은 일상적인 저녁식사를 엄청 푸짐하게 먹지는 않는다. 게다가 되려 스페인 사람들에게 한국은 7시면 저녁을 먹는다 하면 '그럼 잠잘 때 배고프지 않냐'며 걱정했다.




이런 독특한 식사 시간은 최근 좀 달라지기도 했다. 바로 코로나로 정부에서 식당 영업시간에 제한을 뒀기 때문이다. 보통 자정까지는 열려있던 식당 영업시간을 밤 10시까지로 제한했다. 마지막 손님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은 9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빨리 손님을 받아 영업을 하기 위해 이 기간 오후 8시부터 저녁 서빙을 하는 식당들이 많아졌다. 그 이른(?) 시간에 식당에 손님들이 오도록 하기 위해  "저녁을 8시로 당겨 먹어서 지역 요식업계를 응원하자!"는 캠페인이 돌기도 했다.


8시에 저녁 먹기를 독려하는 캠페인 포스터


스페인 사람들도 지난해 오랜 락다운 겪으며 외식이 금지된 삶을 살았기에 외식을 즐기기 위해서는 스페인 기준 아직 한 낮인 8시에 저녁식사를 하는 걸 택했다. 그러니 모든 건 다 절대적인 게 없다고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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