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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Jun 06. 2021

행복에도 치트키가 먹힐까요?

아껴둔 행복들

며칠 전부터 먹고 싶은 게 있다.

바로 라마요르키나 제과점의 딸기 케이크이다. 마드리드 중심 솔 광장에서 1894년부터 영업 중인 오래된 제과점의 케이크이다. 다른 제과점들의 케이크와 달리 무스 범벅이지도 않고, 지나치게 달지도 않다. 특히 커스터드 크림층과 생크림이 어우러지는 시트의 맛은 정말이지 환상적이다. 이 케이크는 올 4월 남편의 생일날 먹어본 게 마지막이었다.


지난 4월 먹었던 라마요르키나 딸기 케이크



케이크가 귀한 시대도 아니고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세상에 너무 먹고 싶어 매일 사진을 보면서도 안 먹는 고행을 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나중에 다가오는 내 생일날 더 행복하게 먹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케이크가 주는 상징성이 있다 보니, 아무 날도 아닌데 사 먹기보다는 아껴두었다 먹으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저 제과점으로 케이크를 사러 가는 날, 분홍색 케이크 박스를 들고 돌아오는 길, 식탁에 케이크를 준비하는 시간, 케이크에 놓인 초를 부는 순간, 그리고 마침내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을 때! 그 행복들을 더욱 알알히 느끼고 싶은 거다. 세 달을 꼬박 기다려 먹은 것이니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상상을 해보며 참고 있다.


아껴둔 나의 행복, 행복의 치트 키이다.

실은 이런 치트키가 하나 더 생겼다. 지난달부터 의도적으로 술을 안 마시고 있는데 굳이 노력할 것도 없이 그동안 술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덕분에 마지막으로 샀던 피노누아 와인은 1/3 병만 비워진 채 여전히 냉장고에 있다. 그런데 문득 한 이틀 전부터 샴페인이 마시고 싶어 진 것이다. 바스켓 가득 얼음을 담아 샴페인을 칠링 해두고 단맛이 나는 우엘바 산 새우를 까먹으며 늘어지게 샴페인을 마시는 여름밤! 어느새 내 손은 와인샵 어플의 주문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러다 문득, 이것도 아껴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일날 라마요르키나 딸기 케이크를 먹고 새우에 샴페인을 마신다면 아, 상상만 해도 너무 신나고 행복하다.




'아끼면 똥 된다'를 믿는 나는, 좋은 것부터 쓰는 편이다. 비싼 화장품이 있으면 매일매일 팍팍 쓰고 좋아하는 향수도 굳이 아껴 뿌리지 않는다. 먹을 때도 맛있고 좋아하는 것부터 먹는다. 차라리 배가 고프고 말지 안 좋아하는 걸 먹기 위해 좋아하는 걸 나중에 먹는다니, 그러다 그 안 좋아하는 음식으로 배라도 불러버리면 낭패다.


하지만 이번에는 현재의 행복을 미래에 좀 양보해보기로 했다. 행복에도 이런 치트키가 먹힐까? 만약 먹힌다면 행복 지수가 충분한 시기에는 종종 행복할 일을 미래에 우울할지 모르는 나를 위해 양보해두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쓰고 보니 어째서 행복한 게 죄 먹는 거랑 관련된 것일까? 나는 먹는 걸로 행복한 사람이었나 보다. 뭐야, 행복하기 쉽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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