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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May 27. 2021

봉준호 감독님과 돼지껍데기의 추억

감독님의 스페인어 통역사가 되던 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조직에서 일할 때 가장 큰 장점은, 개인으로서는 접해 보기 힘든 경험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조직에서 일할 때 그런 경험들을 많이 했다. 소소하게는 한국과 스페인 양국의 장관들이라든가 고위직, 유명인들을 종종 마주쳤다. 촌스럽게 그런 상황이 너무 자랑스럽고 감격스러웠다는 걸 말하는 건 아니다.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순간에도 나의 존재는 전혀 각되지 않았고 현재 어떤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게 아니니 유의미한 만남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소 자랑스럽고 기억에 남는 만남도 있긴 있었다. 바로 봉준호 감독님을 만났을 때였다. 감독님과의 만남이 특별했던 건 그냥 마주친 게 아니라 감독님의 말을 스페인어로 통역해야 하는 통역사의 위치였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세계적인 성공 이후 봉 감독님의 영어 통역을 맡았던 샤론 최 통역사가 같이 유명세를 탔었다. 영화학도인 그녀는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아주 유연하게 통역을 했기 때문에 많은 찬사를 받았다. 사실 나는 영화에 견문이 넓은 편이 아니고 감상자로서도 오히려 남들보다 덜 보는 축에 속한다. 따라서 내가 엄청 잘나서 통역을 맡았다기보다는 속한 조직에서 개최하는 행사였기 때문에 운이 좋아 그런 경험을 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샤론 최 통역사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는 나 역시 나쁘지 않은 평가로 행사를 마쳤는데, 아마 봉 감독님 스타일대로 감독님이 원하는 지점에서 청중의 웃음을 잘 끌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님이 한국어를 할 때면 멀뚱멀뚱 보고 있던 스페인 청중들이 내가 통역으로 전달하자 다 같이 와하-하고 웃으며 고객을 끄덕였다. 덕분에 감독님도 한층 더 편해지셔서 유쾌하게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다만 많은 사전 준비를 했음에도 영화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감독님이 언급하신 외국 감독들의 이름을 재인용할 때 다소 버벅대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측면 얼굴이라 안심하고(?) 그날의 기억을 소환해본다


봉 감독님 외에도 많은 영화감독들을 비롯하여, 김영하, 공지영 작가 등 문인들의 입이 되기도 했다. 조직원으로서 하는 업무라 추가 페이를 받은 건 아니지만 그런 일들이 오히려 반복되는 조직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모든 통역이 즐거운 건 아니었다. 한 번은 현장에서 통역을 진행 못하는 상황을 겪으며 트라우마로 남기도 했다. 또한 행사 통역이 아닌 회의 같은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의전이나 위계질서가 너무 싫기도 했다.




대신 요즘에는 번역, 그중에서도 특히 문학 번역에 새로운 매력을 찾고 있다. 기술 번역은 여러 번 해봤지만 문학 번역은 아직 프로로서 진행한 작품이 없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문학 번역 경험을 쌓고 있는 중이다. 개인적인 차원이라 조직에서 했던 스케일의 일은 하지 못하지만, 한편으로는 조직에서는 불가능했던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서 하는 재미가 있기도 하다. 조만간 재미를 너머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또한 희망해 본다.


그나저나 봉 감독님을 떠올릴 때면 늘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봉 감독님은 스페인식 돼지껍데기 튀김 과자를 좋아했다. 행사 전 잠깐 들린 바에서 기본 타파스로 그걸 내줬는데 묵묵히 맛보다가 혹시 이게 뭐냐며, 너무 맛있다고 더랬다. 덕분에 감독님이 돌아가는 길에 다른 것도 아닌 바로 돼지껍데기 튀김 과자를 선물로 드렸더랬다. 작은 선물에도 감사히 웃으시던 감독님이 기억난다. 봉 감독님과도 역시 어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이후 22페이지에 달하는 <기생충> 관련 지면 인터뷰를 스페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감독님을 매체에서 볼 때면 나 혼자서는 내적 친밀감이 밀려오곤 한다.


당장 눈 앞에 큰 이익이 없더라도 새로운 일을 주저하거나 계산하는 편은 아니다. 마냥 즐겁기만 한 일은 없기에, 웃으며 추억하는 일들도 그 일을 할 당시엔 촘촘한 스트레스를 아니 받진 않았지만 돌아보니 전부 다 정답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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