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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Jul 13. 2021

혐오와 상처로 얼룩진 유로 2020

흑인 키커가 승부차기에 실패하면 겪는 일

영국 대 이탈리아 유로 2020의 결승전이 열리던 날에 영국령인 지브롤터를 여행했다. 스페인어로 '선'이라는 뜻을 가진 '리네아'라는 도시에서 말 그대로 선 하나만 넘으면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영국 땅에 도착한다. 공항이자, 활주로이자, 국경인 길을 지나 간단한 신분증 검사를 하고 나오면 가장 먼저 빨간색의 전화 부스가 기다리고 있다. 영국에 도착한 것이다. 영국 억양의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투박한 피시 앤 칩스를 주력 메뉴로 파는 레스토랑과 파인트 사이즈의 잔을 기본을 제공하는 펍이 즐비하다. 건물의 벽돌색마저 영국의 그것이다.


런던 코벤트가든이 떠올랐던 지브롤터 메인 스트릿 끝 광장에서 피시 앤 칩스와 양고기구이를 점심으로 먹고 우리는 택시투어를 하기로 했다. 마이크라는 이름을 가진 기사는 런던에서 태어나 17살에 지브롤터로 왔고 내년이면 60살이 된다고 했다. 영국 억양으로 영어를 할 때면 누구보다도 영국 사람 같았는데, 스페인어 그것도 남부 사투리가 섞인 스페인어를 할 때면 누구보다도 안달루시아 사람 같았다. 원래 일찍 퇴근하려다가 우리가 투어를 하고 싶어 하는 걸 보고 조금만 더 일을 하기로 한 거라면서, 투어가 끝나면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맥주 3병을 원샷 때린 다음에 9시에 하는 유로 결승전을 볼 거라고 했다.


영국이 처음으로 결승전에 올라간 거라구! 우승이 코앞이야!!


택시의 앞부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장식을 붙여 놓은 그는 파란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지브롤터에서 나갈 무렵에는 축구 중계 입간판을 내건 펍에 슬슬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축구 종주국 홈구장에서 열리는 유로 결승전, 영국이 유로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에 도전하는 경기였다. 친절했던 택시기사 마이크 때문인지 아니면 머물고 있던 리조트가 영국계 체인이라서 유난히 영국인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인지, 나는 내심 영국이 우승하길 바랐다.


어쨌거나 맛있게 먹은 피시앤칩스


그러나 영국이 승리할 것처럼 보였던 경기는 후반 이탈리아의 동점골이 터지며 팽팽해졌고 결국 승부차기로 이어지고 말았다. 하얀 얼굴의 두 키커가 승부차기를 성공한 뒤 영국의 세 번째 키커가 등장했다. 그는 검은 얼굴을 가진 래시포드였다. 그리고 그의 슛은 골문을 가르지 못했다. 범죄 심리학자들이 '크리미널 마인드'를 장착하게 되는 것처럼 유럽에 사는 소수 인종인 나는 그 누구보다도 주류에 속한 이들의 마인드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의 슛이 들어가지 않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큰일이네, 백인들의 잔치를 흑인 키커가 망쳐버렸군


너무나 공교롭게도 연이어 나온 네 번째, 다섯 번째 키커 또한 유색인종이었고 이들은 전부 승부차기에 실패했다. 특히 영국 골키퍼의 선전으로 다시 승부가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던 찰나, 마지막 키커 사카의 실패는 이탈리아의 승리를 결정짓는 한방이 되었다. 거의 숨이 멎을 듯 경악하며 좌절하는 키커들을 비추며 유로 2020 중계가 막을 내렸다.


다음 날 영국 뉴스를 틀어보니 아닌 게 아니라 밤새 상황이 심각했던 모양이다. 나란히 승부차기에 실패한 유색인종 키커들에게 쏟아진 비난과 인종혐오적 발언들은 도를 넘었고, 트위터는 밤새 관련 계정을 삭제해야 했다. 영국 축구대표팀 감독과 보리스 총리까지 나서서 공개적으로 이런 발언을 비판하며 인종차별 이슈는 유로 2020의 메인 뉴스가 되었다. 그렇게 축제가 될 뻔했던 유로 2020은 결국 '가슴 아픈(heartbreaking)' 패배과 '혐오스러운(disgusting)' 인종차별로 얼룩진 채 끝났다.




유럽에 살면 사소한 불친절도 '혹시 내가 아시안이라서 그런가?'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뉴스에 나오는 심각한 인종 혐오 범죄의 대상이 된 적은 없지만, 그런 뉴스를 볼 때면 내 일처럼 속상한 건 어쩔 수 없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 혐오 범죄의 대상이 내가 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유로 2020의 인종차별 이슈도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사실 나는 성인이 되어서 유럽으로 온 케이스이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내게 갖는 '불편한 감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편이다. 나 역시 한국에서 주류 민족으로 사는 동안 이민자들을 바라보던 시선이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의 세 키커는 피부색이 어둡다는 것 외에는 완전한 영국인들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심지어 영국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영국 선수로 활동하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자국민이 보내는 혐오 발언이 얼마나 아프게 와닿을지 감히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런데 혐오를 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다. 그들은 자신과 무관한 특정 대상을 혐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혐오가 용인되는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피부색이 달라서, 몸이 뚱뚱해서 말라서, 키가 커서 작아서, 정치색이 좌라서 우라서, 돈이 많아서 없어서, 나이가 적어서 많아서, 모든 건 다 혐오의 대상이 된다. 요새는 남자라서 혐오하고 여자라서 혐오하는 세상이다. 내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혐오의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심어놓은 혐오의 씨앗은 끈질기게 자라서 그들이 가진 모든 존재의 특징을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비단 유럽이나 인종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사람 사는 곳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축제는 끝났지만 혐오는 남았다.

그리고 이 혐오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은 바로 그들과 나, 우리 자신이다.


부디 다들 건승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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