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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Jul 24. 2021

MBC 올림픽 방송 유감

차라리 웃기기라도 했으면

올림픽을 꽤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전 세계인들의 축제라는 말이 무색하게 감염병에 여전히 신음하는 와중에 1년이나 미뤄져 개최된 올림픽은 준비 기간 내내 삐걱거렸다. 아마 기억하는 이는 많이 없겠지만 실은 마드리드도 2020년 올림픽 개최 후보지 중 한 곳이었다. 마드리드는 2016년에도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리우 데 자네이루에 패하였고, 거의 마지막 도전이라고 할 만큼 사활을 걸어 준비한 2020년 올림픽 유치도 도쿄에 밀렸다. 마드리드 주민으로서 은근 올림픽 유치를 바랐던 까닭에 그새 세상이 뒤 바뀌어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올림픽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모두가 처음 겪어보는 세상을 맞이하고 있는 시대, 올림픽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사상초유'라는 단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붙었다. 사상초유 지구촌 행사의 시작을 지켜보는 와중에 사상초유의 방송 사고가 터졌다.


MBC가 올림픽 개막식 생중계 중 각국 선수단 소개에 부적절한 문구와 사진을 사용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사진을 국가 소개에 삽입한 MBC (사진 출처: 나무위키)


ㅇ 우크라니아 - 체르노빌 원전 사고 사진 삽입
ㅇ 아이티 - 폭동 사진 및 대통령 암살 사건 문구 삽입
ㅇ 노르웨이 - 연어 사진을 대표 이미지로 소개
ㅇ 루마니아 - 드라큘라 사진을 대표 이미지로 소개
ㅇ 칠레 -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와 전혀 상관없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인용
ㅇ 마셜제도 - 한때 미국의 핵실험장으로 소개


한 국가의 비극적인 역사나 부정확한 정보 혹은 지나친 스테레오타입을 보여줌으로써 배려가 부족하고 편협한 방송이었다는 의견을 뛰어넘어 상대 국가를 모독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까지 나오는 중이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며 여러 유감이 들었다.

우선 온 나라와 언론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는 와중에 책임자들이 겪을 마음고생에 대한 인간적인 유감이다. 분명 저 방송은 잘못된 것이나 그 뒤에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사람이라면 지금 꽤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본인들의 편협한 시각과 부족한 감각이 이런 큰 질타를 받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업무에서 상사 한 명한테만 깨져도 밥이 안 넘어가는 게 직장인의 숙명인 거 늘, 온 나라를 넘어 외신까지 질타하는 실수를 했으니 얼마나 괴로울 것이냔 말이다.


한편으로는 저런 방송이 나비효과처럼 불러일으킬 사회적 균열에 대한 유감이다.

스페인에서도 얼마 전 방송 진행자들의 편협하고 부적절한 발언들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스페인판 <마스터셰프>에서 발생한 일이다. 이 프로그램은 스페인 공영방송국(TVE)에서 방영되는 데다가 시청률이 15%를 웃도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최근 시즌에 상하이 출신의 지아핑이라는 사람이 경연자로 참가했는데 그녀에게 보인 진행자들의 태도가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진행자들과 심사위원들이 그녀에게 재미와 농담이라는 미명 하에 알 수 없는 중국어 같은 말을 지껄이고, 그녀의 요리를 평가하며 일부로 어설픈 스페인어로 이야기를 한다든가, 중국식 발음을 흉내 내며 이야기를 한 것이다.


스페인어는 동사 변화가 많은 언어이기 때문에 스페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은 주어나 시제에 따른 동사 변화를 하지 않고 그냥 동사원형으로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또 중국인들은 R발음을 잘 못하는 편이기 때문에 R로 발음해야 하는 곳에 L로 발음하는 경우가 있다. 이 두 가지 포인트는 스페인 사람들이 동양인의 어설픈 스페인어를 놀리는 데 아주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이다. 이 뻔한 소재가 스페인 <마스터셰프>에 등장했다.


문제는 경연자 지아핑이 스페인에 산지 13년이나 된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당연히 중국식 발음이 있긴 하나 그녀의 스페인어 구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저 뻔한 잣대를 들이밀며 유창한 스페인어를 하는 그녀 앞에서 일부러 어눌한 스페인어로 말한 것이다.


MBC의 중계 참사와 스페인 TVE의 방송 태도가 사회적 균열까지 일으킬 수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며칠간 조롱거리가 되고 책임자가 응당한 징계를 받고 나면 사람들은 금세 이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출 것이다. 그러나 분명 어떤 이들의 무의식 속에는 저런 게 재밌고 해도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삶의 어느 순간 그것을 실천할 것이다. 아마 TVE의 진행자들도 그간 방송이나 사회에서 보여준 자연스러운 인종차별의 농담을 학습했을 것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대상과 마주쳤을 때 배운 대로 보여준 것뿐일지 모른다. MBC의 방송 내용도 누군가의 머릿속에 남아 그가 어느 날 우크라이나 사람이나 노르웨이 사람을 마주친다면 자연스럽게 실천을 할지 모른다.


'아, 원전사고로 초토화가 되었던 나라에서 왔구나!'

'아, 너네 나라는 매일 연어를 먹니?'


저런 대화가 얼마나 매력 없고 웃기지도 않은 말인지 그 미래의 누군가는 알까?

MBC 담당자들은 알았을까?


이런 이야기를 써도 이 이야기는 힘이 없다. 그러나 방송은 다르다. 스피커가 가진 힘이 그 누구보다도 크다. 아무리 방송국의 파워가 이전만 못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친구들 앞에서라면 웃을 수 있는 농담이 방송을 타면 그럴 수 없는 이유는 그 힘 때문이다. 그런 힘을 가지고 올림픽 중계방송에서 보여준다는 내용이 고작 원전사고의 나라, 드라큘라의 나라, 연어의 나라라는 표현이라니 심히 유감이다. '문화, 국적 등 다양한 차이를 극복하며'라고 주창한 올림픽 정신에도 벗어나고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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