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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Jul 27. 2021

토닥토닥 마음을 다독이던 버터쿠키

치유의 베이킹

직장인 시절 취미는 베이킹이었다.

잠들기 전  보던 유튜브 베이킹 영상이 시작이었다. 영상을 계속 보다 보니 직접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카스테라를 시작으로 발효빵까지 꽤나 이것저것 구워보았다. 인터넷으로 알음알음 베이킹을 독학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맛도 모양도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건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도 거북이처럼 아주 느리게 나아지긴 했다.


베이킹과 사랑에 빠진 순간

몇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그럴싸한 식빵을 굽게 되었을 때 베이킹과 제대로 사랑에 빠졌다. 반죽이 부푸는 모습을 지켜보며 제대로 발효가 되는구나 싶어 신기했고 오븐에서 빵실하게 올라오는 식빵을 바라보며 설레었다. 그리고 갓 구워진 식빵을 꺼내 손으로 조심스레 뜯어보았을 때 닭가슴살처럼 갈라지던 빵결을 보고 기뻐서 동동거리던 기억이 난다.


매번 실패하던 종목을 성공했을 때의 기쁨도 컸다. 내게는 마카롱이었다. 원래 마카롱이 제대로 알고 굽자면 꽤나 고급 기술의 제과이고 아주 미세한 차이로도 결과달라질만큼 예민한 아이이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늘 꼬끄가 제대로 부풀지 않거나 속이 텅 비어 있기 일수였다. 독학으로 배운 홈베이커는 도저히 구울 수 없는 과자라고 생각해 한동안 아예 굽기를 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좀 더 상세히 알려주던 유튜버의 가르침에 따라 마지막 도전이다 생각하고 구운 마카롱이 어설프게나마 모양을 갖추어 나왔다.  완벽하지 않은 모양마저 너무 사랑스러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직접 만든 마카롱과 쿠키, 포레누아 케이크


어느 순간부터는 퇴근 후 베이킹을 거의 명상처럼 했다.

간을 봐가면서 수정을 할 수 있는 요리와 달리 베이킹은 일단 오븐에 넣으면 수정이 불가하다. 그래서 1g 단위까지 아주 세심하게 계량을 해야 하고 넣는 순서와 반죽의 질감까지 자세히 살펴보며 만들어야 한다. 오븐 온도 역시 반죽을 완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오븐의 숫자만 믿지 말고 여러번 구워보며 가장 적절한 온도를 찾아야 한다. 따라서 베이킹을 하는 동안은 온 신경이 베이킹에만 집중된다. 다른 걱정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런 집중이 주는 휴식이 있었다.


일상의 끝에서 건진 작은 행복

언제나 구워진 완성품을 보면 처음처럼 신기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계란, 우유, 버터, 오일, 밀가루, 설탕이었던 재료들이 전혀 다른 질감과 맛의 음식으로 변해 있었다. 빵이 유난히 잘 구워진 날이면 그날을 행복하게 마감할 수 있었다. 분명 열심히 일했는데 딱히 성과라고는 없었던 쳇바퀴 같은 하루의 끝에서 겨우 건져낸 하나의 성공이었다. 그것에 취해 퇴근 후 베이킹에 더욱 열성적이었는지 모른다. 이래 봬도 결코 이 하루가 어제와 같지 않았다고, 분명 어제랑은 다른 새로운 빵을 구워냈다고 스스로에게 건네는 치유의 몸짓이었다.


지난 밤에 구운 파운드케이크로 차린 아침


그래서 퇴근 후 그런 일을 '치유의 베이킹'이라고 불렀다. 이후 실로 이런 나의 마음과 꼭 맞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소년원에서 제과제빵을 배우는 아이는 재범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기사였다. 일단 먹고살 수 있는 기술이기도 한 데다가 즉각적인 결과는 성취감을 주고, 포근한 빵 냄새가 심리적 위안도 준다는 내용이었다. 몇번이고 동의한다.


실패하는 베이킹은 없다

아마추어 베이킹에는 대단한 실패랄 게 없다. 워낙 재료가 달달하고 맛있는 것들이라 설사 모양은 좀 실패할지라도 그 맛은 어떻게든 꽤 먹을만하다. 안 부푼 마카롱 꼬끄도 와그작 와그작 씹어 먹으면 고소한 아몬드와 달달한 설탕 덕분에 맛있고, 좀 부풀다 만 카스테라도 우유와 함께 먹으면 나쁘지 않게 먹을 수 있다. 베이킹은 그 누구도 실패자로 만들지 않는다.


베이킹을 하며 만든 모든 것들을 다 좋아했지만 특히 자주 굽고 좋아했던 건 버터쿠키이다. 발효를 기다릴 필요가 없고 오븐 시간도 길지 않아 늦은 밤에도 빨리 구워낼 수 있다. 같은 버터쿠키이지만 깍지에 따라 다른 모양을 짤 수도 있고 같은 깍지라도 손놀림에 따라 다른 모양을 만들 수 있다. 또 가나슈나 잼을 샌드 해서 샌드 쿠키로도 변신 가능하고 다양한 데코도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버터쿠키를 자주 구웠다.


가장 자주 구웠던 버터쿠키


괜찮아, 버터쿠키가 있으니까 

늦은 밤 버터쿠키 반죽을 오븐에 다 넣어두고 나면 그제야 문득 오래 서있던 다리가 아픈 걸 상기하곤 했다. 그러면 한 칸 계단 높이의 낮은 받침대를 의자 삼아 쭈그려 앉았다. 어느새 시간은 다음 날로 바뀌어 있던 적도 많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 홀로 오븐이 돌아가던 부엌에 오도카니 머물렀다. 그 시간은 외로움보다는 평화에 가까웠다. 어느 날의 속상함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던 건 분명 오븐 속 버터쿠키 덕분이었다. 작은 버터쿠키가 건네는 달콤한 위로가 그 어떤 위로보다도 소중했던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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