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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Oct 16. 2021

삶에 땡땡이 양말이 필요한 순간

무용하면 어때, 예쁘잖아

가끔 쓸데없는 걸 사고 싶을 때가 있다. 독립서점에서 본 예쁜 틴케이스에 든 타로카드라든가, 골동품 가게에서 본 빈티지 찻잔 같은 것들이다. 타로카드도 볼 줄 모르고, 이미 찻잔이 넘치는 집에 사는 내게 저런 것들은 무용하다.


저런 물건들에 무의식적으로 손이 가다가도 문득 청소를 해야 하는 순간이 떠오르면 가던 손이 멈춘다. 물건을 정리하고 버리는 것도 상당한 노력과 고민이 소요되는 일이라 갈수록 무언갈 살 때 신중해지는 탓이다. 언젠가 그 물건이 버려질 날을 생각하면, 굳이 무용한 것들에 돈과 공간을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이길 때가 많다.


그래도 리스본 벼룩시장에서 산 빈티지 찻잔은 볼수록 마음에 들어


물건을 살 때 유용함을 생각하는 것처럼 글을 쓸 때면 나도 모르게 유용한 내용을 쓰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런 글이 더 쓸모 있지 않을까 하는 강박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쓰는 입장에서도 실용적인 글이 더 마음 편하다. 의외로 꾸준히 쓸 수 있는 힘은 능력보다는 인내에 있다. 인내라는 건 엉덩이 붙이고 앉아 뭐라도 쓰려는 인내도 포함되지만 쓰고 있는 자신과 그 결과인 글을 견디는 것에 더 가깝다. 다수에게 불완전한 나를 드러내야 한다는 부담감과 한 달만 지나도 부끄러울 활자들이 어느 공간에는 박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견디는 것이다. 글에 대한 좋지 못한 평가 역시 견뎌야 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러니 글 안에 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글보다는 관찰자로 비켜서서 차라리 누군가에게는 유용할지도 모르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편이 쓰는  더 편할 때가 있다. 그런 글은 공격을 받더라도 나와 분리해서 생각하는 게 좀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글은 쓰다 보면 가끔 고루해져서 나조차 읽기 싫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교훈적인 말투로 끝맺음을 하고 마침표를 찍는 순간은 더욱 그렇다. 그런 글을 견디는 건 때로는 새벽 2시에 적어둔 감성 일기를 견디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래서 가끔 '예쁜 쓰레기'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 유용함도 없지만 읽고 나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글이다.


의외로 삶의 위로는 무용한 것들에서 온다. 매일 흰 양말만 신다가 어느 날 땡땡이 무늬의 양말을 신으면 괜히 그날 하루 기분이 유쾌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땡땡이가 양말의 기능에 있어 얼마나 유용한가를 따진다면 참 무용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보통 경제적이라 하면 주어진 자원으로 최대 효용을 얻는 것인데 흥미로운 건 효용은 주관적이라는 점이다. 기업은 객관적 이윤을 쫓을지언정 인간은 심리적 만족을 최대 효용으로, 즉 가장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여길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한정된 나의 시간을 내게 이익이 될 수는 있지만 불편한 사람과 보내기보다는 무용한, 오히려 내가 챙겨줘야 하는 강아지와 고양이와 보낼 때 더 행복한 법이다. 굳이 흰 양말보다 좀 더 비싼 땡땡이 양말을 사는 일도 그와 같다.


딱히 유용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계속 쓰는 이유도 글이 좋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글을 쓸 때 행복하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무용할 때 더 극대화된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다는 건 그만큼 어떤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뭐든 유용함과 이익을 따지는 세상에 지친 날이면 무용하지만 예쁜 것들 그래서 행복을 주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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