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루나 Oct 08. 2021

'걱정하지 마' 그 말이 뭐라고

걱정과 태평을 오가며 사는 우리에게

걱정과 태평 사이를 오가며 산다. 세상 모든 게 그러하듯 걱정의 정도도 상대적이라 어디에서는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핀잔을 듣고 다른 곳에서는 참 편하게 산다는 소리를 다 듣는다.




코로나 백신 접종률이 유럽 2위인 나라, 그중에서도 24시간 워크인 접종 센터가 2곳이나 있는 도시에 살면서도 쓸데없지만 합리적인 걱정으로 다소 늦게 백신을 맞았다.


1차를 맞으러 가던 날 오후에는 비가 왔다. 마침 맞으러 가는 딱 그 순간에만 잠깐 하늘이 개었는데 구름 사이 파란 하늘을 보며 갑자기 감개무량해져 버렸다.


'하늘이 참 아름답구나. 내일도 이 하늘을 볼 수 있겠지.'


단언컨대 그날만큼 예뻤던 하늘을 근래에 본 적이 없다. 동시에 나의 마음은 이상하게 평화로워져서 마치 마지막 순간 모든 걸 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그럭저럭 아쉽지는 않은 삶이었다는 소회가 이상하게 기뻤던 건 덤이다.


그런 내적 생쇼를 거친 1차 접종 후, 놀랍도록 아무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침대 맡에 체온계, 타이레놀, 물을 든든히 준비해두고 잤는데 모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실은 아예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은 건 또 아니었다.

접종 후 2~3일 후부터 주사를 맞은 쪽 겨드랑이에 멍울이 생겼다.


그런데 만약 아무 이유 없이 멍울이 생겼으면 놀랐을 텐데 접종 후 생긴 멍울이라 오히려 더 안심이 되기도 했다. 대충 검색해보니 화이자 접종 후 특히 여자들에게서 발생하는 흔한 증상이라 하여 나도 태평해지기로 했다. 오히려 걱정하는 엄마에게 멍울을 가리켜 '겨멍 겨멍' 이라 칭하며 깔깔깔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이런 태평함 가운데 걱정이 다시 몰려온 건 2차 접종일이 다가오면서였다. 아직 멍울이 그대로인데 예정대로 2차 접종을 맞아도 되는지 문득 걱정되기 시작했다.


스페인 공립 의료기관에 문의하려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사립 의료보험 어플을 통해 영상상담을 신청했다. 지난해 연 백만 원에 육박하는 사립 의료비를 내고도 단 한차례도 병원을 이용한 적이 없기에 겨멍에 따른 접종 가능 여부를 문의하기 위해 사립병원 어플을 키는 건 묘하게 통쾌했다.


하지만 어플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는지 영상상담을 대기하고 있던 와중에 의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사실 굳이 영상으로 상담할 이유는 없었던지라 전화로 상황을 설명하니 의사는 오히려 거의 나무라듯 이야기한다.


"그건 환자분 림프절이 면역 형성을 위해 열심히 싸운다는 증거입니다. 걱정할 필요 없고 시간 좀 지나며 알아서 가라앉을 건데 혹시 걱정되면 초음파 촬영 진단서 줄 테니 나중에 한번 촬영해보세요."


홀가분한 기분이 든 것도 잠시 전화를 끊고 다시 걱정이 몰려왔다. 의료보험 어플에서는 아직 나의 영상상담 진료 예약이 유효한 걸로 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혹시 내가 예약 미스한 걸로 착각해 문제 생기거나, 의사가 진료 미스한 걸로 간주돼서 불이익받는 거 아냐?'


잠시 고민 끝에 나는 어플을 통해 의사에게 메시지를 보내기에 이른다.


[아직 영상상담 예약이 유효한 걸로 뜨는데 제가 취소하거나 뭘 해야 하나요? 그리고 초음파 진단서는 어디서 내려받을 수 있죠?]


의사는 내 첫 질문에는 대답도 없이 초음파 진단서 위치만 알려 주었다. 그걸 보니 '어플 문제인데 의사 불이익까지 내가 걱정할게 뭐람' 하는 생각과 함께 다시 태평해지기로 했다.




물론 내 '겨멍' 걱정은 그게 끝은 아니었다.

나는 그 후 2차 접종 2일 전에 다시 다른 의사에게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전화상담으로 '겨멍'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2차 접종을 맞아도 되는지 재차 물었으며 지난 화요일 접종 직전에 다시 한번 간호사에게 '겨멍'을 언급했다.


내 정보를 등록하던 간호사는 왼쪽에 멍울이 있는데 이번에도 왼쪽에 맞을 거냐고 물어봤고 나는 다시 한번 걱정스러운 얼굴로 '혹시 오른쪽에 맞는 걸 추천하는 거냐'라고 물었다. 계속 자신만만하던 젊은 간호사는 내 질문에 문득 자신 없어진 얼굴로 옆에 더 노련해 보이는 간호사에게 '왼쪽 팔에 접종 후 멍울이 생겼다는데 이번에도 왼쪽에 접종해도 되는 거냐'라고 물었고 노련해 보이는 간호사는 상관없다고 이야기해줬다.


그래서였다. 노련해 보이는 간호사 옆에 팔을 걷어붙이고 게 된 사연은.


아까 멀리서 '멍울이 있어도 상관없다'라고 크게 이야기했던 노련한 간호사는 가까이 앉은 내게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우리 까리뇨*, 걱정하지 마. 림프 부종은 아주 흔한 증상으로 우리 같은 여자들한테는 더 흔해. 여기 있는 간호사들도 다 접종했는데 그런 사람들 많았어. 목 쪽에도 부을 수 있고 한데 다 괜찮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 영어의 달링(darling)과 같은 스페인어 애칭으로 스페인에서는 연인 간에도 많이 쓰지만 처음 보는 타인, 특히 여성 연장자가 더 어린 사람에게 흔히 사용한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이상하게도 저 말을 듣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최근 들어봤던 그 어떤 말보다도 다정한 말투로 '아무 걱정하지 마'라고 이야기해주는데 그 목소리가 어쩜 그리 듣기 좋은지 저 말 한마디에 2차 접종에 대한 걱정은 물론, 그냥 삶에 대한 걱정이 다 녹는 기분이 들었다.


걱정 어린 얼굴로 병원 밖에서 기다리던 남편에게 접종한 팔을 흔들며 신이 난 얼굴로 나오는 나는 이상해 보였을게다. 혹시 내가 2차 접종 후 부작용으로 정신 착란을 일으킨 것이라 걱정하지 않도록 돌아가는 차 안에서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줬다.


"참 말의 힘이 크다 그치.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왠지 무책임한 것 같아서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싫어했는데 오늘 들은 말은 너무 따뜻해서 없던 걱정까지 다 사라지는 거야. 나도 누군가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저렇게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사실 이건 이 글을 쓰기 전까진 생각하지 않았던 건데, 글을 다 쓰고 나니 그 말을 가장 먼저 해주고 싶은 사람을 만난 것 같다. 걱정을 하면 하는 대로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나를 다그치기만 했지, 언제 내가 나에게 스스로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해준 적이 있었던가. 그러니 오늘 밤에는 말해야겠다.


다 괜찮아져.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덧.


저는 제 감성을 싫어했어요.
가볍고 태평하게 살고 싶은 마음과 충돌하는 제 감성은 늘 진지한 걱정 투성이었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감성은 안 돌보면 금세 무뎌지기도 하더군요. 그렇게 무뎌진 감성으로 살다 보니 이젠 섬세한 사람들을 보면 무척 부러워요. 그럼에도 여전히 감성이라는 단어의 무거움은 싫어 이 매거진의 이름에 굳이 '갬성'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유행어를 끼워 넣었었지요.

(아무도 모르셨겠지만)
오늘 드디어 이 매거진의 이름을 바꿨습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냥 딱 보통 사람의 감성을 갖고 사는 사람이 쓰는 글이라며
<36.5도씨의 글>이라고 제목을 짓고 싶었는데
점(.)이 매거진 제목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여 그냥 한글로 풀어썼어요.

그래서 <삼십육점 오도씨의 글>이 되었습니다.
오도씨는 왠지 괴상한 사람 이름 같기도 하네요.

삼십육점 오도씨만 지키고 살아도 건강하다는 증거일텐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몸과 마음 모두 딱 그 정도만 유지하고 살고 싶네요.

다들 이번 한주도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무엇이든지요.


매거진의 이전글 <월간 샘터>에 글을 보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