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손절이 필요해

by 이루나

스페인 관련 제너럴리스트라 자부하며 나름 두루 많은 걸 알고 어떤 분야든 조사 시간만 주어지면 꽤나 그럴듯한, 때로는 유의미한 보고서를 작성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게 작년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아주 심도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낯선 분야였던 기업과 경제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던 것이다. 자료 조사를 위해 스페인 금융기관이나 관련 리서치 회사에서 발표한 보고서들을 여럿 찾아 읽었지만 주어진 시간 내 갑자기 많은 인풋, 대체로는 단기 현황만을 다룬 내용을 억지로 집어넣으려니 하나도 소화하지 못하고 체하기 일수였다. 나는 숲을 보고 싶은데 눈앞의 나무도 아닌 나뭇잎만 보고 있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경제 팟캐스트나 유튜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본래는 관련 용어에 익숙해지고 기본기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찾다 보니 어째 죄다 투자에 관한 콘텐츠만 가득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것들은 또 너무 원론만을 다루고 있어 단시간에 보고서를 써야 하는 내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찾다 보니 결국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전기 모빌리티, 친환경, ESG 경영 등 모든 게 결국 다 투자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듣다 보니 내 선입견과는 달리 상당히 광범위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결국 여러 투자 팟캐스트 구독자가 되었다.


본래 돈 이야기 싫어하고 투자나 재테크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본 사람인지라 처음에는 억지로 필요한 주제의 에피소드만 골라 들었다. 금융가 사람들 특유의 거만하면서도 권태롭고 사무적이면서도 감미로운 말투도 듣기 거북했다. 그래서 보고서가 끝난 후 원래 들었던 책 이야기 팟캐스트를 다시 듣는데 정말 벅찰 정도로 행복하고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것도 잠시뿐, 그동안 억지로 우걱우걱 씹어 먹었던 경제 콘텐츠 덕에 나도 모르는 새 약간의 기본기가 생긴 건지 점점 경제 뉴스를 보면 이해되는 부분이 많아지고 문득 자발적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즈음 보고서 작성 후 바로 멀어졌던 투자 팟캐스트들도 다시 구독하기 시작했고 요즘에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즐겨 듣는 중이다.




그런 걸 구독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은 참 투자를 많이 하는 것 같다. 투자를 안 하면 이상한 또는 안이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정도라고 하니 스페인에 사는 나로서는 다소 낯선 느낌이다. 내 지인들 중 정말 투자와는 나보다 더 거리가 먼 것 같은 친구 한 명도 벌써 4년 전 비트코인을 사모으는 중이라고 이야기해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이런 한국에서 얼마나 투자가 보편화되었는지는 언어 습관만 보아도 실감된다. 대표적으로 '손절'이라는 표현이 있다. 원래는 주식 투자에서 쓰이는 표현이었는데 요즘은 누군가와 인연을 끊거나 무언가를 처분할 때 등 그 의미가 확장되어 일상에서도 자주 쓰이고 있다.


손절: 시장에서 주식을 매입하였는데, 자신의 예상과 달리 주가가 떨어질 때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그 주식을 매도하는 것


스페인어에서도 본래 의미의 손절, 즉 손해를 감수하고도 잘라낸다는 뜻과 비슷한 표현이 있다. 바로 Cortar por lo sano이다. 직관적으로는 피부의 일부가 심각하게 감염되어 있다면 다른 부위로 감염이 번지지 않도록 감염 부위를 잘라내는 의미로 쓰인다. 감염된 부분을 완전히 잘라냄으로써 추가 감염의 싹을 완전히 차단하는, 말 그대로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추가 손해를 막기 위해 잘라낸다는 '손절'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얼마 전 공원을 산책하며 손절에 대해 생각하다 올해 나를 위해 손절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다. 일단 하나는 확실히 손절한 듯하다. 관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습관. '나는 돈 이야기 싫으니까 경제도 알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해왔지만 외부의 계기로 관심을 두기 시작하니 경제 뉴스들이 이해되는 게 신기하고 재밌어 일상에 새로운 활력이 생겼다. 경제라는 게 '돈' 하나로만 표현될 만큼 단순한 것도 아니고 사회의 많은 부분과 결합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정치나 사회면의 뉴스에도 보는 시각이 조금 더 넓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사사로운 가십이나 개인들의 논란거리에는 무관심해져 사고가 좀 더 쾌적해지기도 했다.


급기야 얼마 전에는 스페인 거래 은행의 주식계좌를 열기도 했다. 정말 내 평생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을 한 것이다. 아직 한주도 매수하지는 않았지만 주식계좌를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나이가 들수록 지난 것들과 손절이 어려워진다. 손절이 나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부정 같이 여겨져 끊어내기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때론 손절은 도마뱀의 꼬리처럼 안 좋은 상황에서 벗어나 더 건강한 새살을 돋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앞으로 매수하게 될 주식만은 손절하는 일 따위는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