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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Apr 25. 2022

용서가 그날처럼 맑고 쉬운 일이라면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유독 유명한 지점들이 몇몇 있다. 사실 짧은 시간 순례를 결정하고 출발했기에 이런 곳들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많이 찾아보지는 못했다. 또 걸으면서는 매일의 피로로 도착지의 알베르게에서 쉬느라 알고도 찾아가지 못한 곳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길 안에 있어 반드시 지나쳐야만 하는 유명한 지점이 한 곳 있었으니 바로 '용서의 언덕'이다.


팜플로나를 빠져나오면 곧 만나는 곳인데 팜플로나에서 시작했던 나는 첫날 이 언덕과 마주했다. 순례길에서 '언덕'이란 오르막길 그리고 그보다 더 괴로운 내리막길(걷는 족족 무릎이 닳는다는 느낌이 든다)을 의미하기에 순례자에겐 썩 반갑지 못한 것이지만 난 걷기 전부터 이 용서의 언덕에 대한 기대가 컸다.


걷기도 전부터 누굴 증오하며 올라야 하나, 오른 뒤에는 어떻게 용서할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혹시 용서의 언덕 정상에 서서 바람을 끌어안고 엉엉 울지는 않을까, 그렇게 울고 나면 다 잊고 새로워지는 기적 같은 일들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실은 가장 용서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도 했다. 내게 제일 못되게 굴고 나를 제일 자주 그리고 크게 배신한 사람은 애석하게도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귀하고 불쌍히 여기시어 늘 함께하신 하느님의 자애를 모르고 죄인으로 살았던 나였다.


그러나 그런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생각보다 오르막길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그간 날씨 좋은 주말이면 마드리드 근교의 산들을 등반했던 덕일까, 아니면 길에서 만난 순례자들과 신나게 이야기하며 걸었던 덕일까, 증오와 용서는커녕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오르는 고통에 괴로워하며 내가 왜 이 길에 서있냐며 누구를 원망하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용서의 언덕 위 유명한 조형물 앞에서 우리는 각자 또 같이 사진을 찍고 멋진 풍경만 실컷 보고 내려왔다.


용서의 언덕에 올라서다 (c)이루나


용서를 다시 떠올린 건 불과 며칠 전이다. 그냥 하루를 살고 있는 와중에 불현듯 내 마음에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다는 빛이 들어왔다. 아니, 먼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용서도 할 수 있었다. 내가 미워하고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는 건 그들 자체인가 아니면 그들이 했던 어떠한 일들이나 그들이 가졌던 어떠한 태도인가 생각해보았다. 분명 후자였다. 그러니 그런 모습이나 행동이 사라지면 나 또한 그들을 미워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미 다 지나가 사라져 버린 일들인데도 홀로 과거에 머물며 끊임없이 미움에 괴로워하고 있는 일들도 있었다.


물론 괴로운 얼굴들에 지향을 두고 기도하는 건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나의 증오도 사라지고 또 나도 용서받을 수 있다. 나 역시 살면서 많은 이들에게 때로는 알고도 때로는 모른 채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용서를 구하고 싶은 일들도 당연히 많다. 나는 하지 못하는 일을 남들이 내게 해주길 바라는 건 정말 큰 욕심이다. 세상과 타인에 대한 분노를 품은 채 하느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우리는 늘 기도 중에 이런 말을 되뇌는 게 아닐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가끔 이제와 신앙인으로 살아가려는 내 모습이 가식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세속에서 많은 죄를 저질렀고 또 지금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잘못하고 있는 일들이 많다. 그중에는 버릇이 되어버린 잘못들도 있고 때로는 잘못인 줄도 모르고 행하는 일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이 괴로울 때면 차라리 그냥 이제껏 살아온 것처럼 죄를 저지르며 사는 게 오히려 더 솔직하고 정직한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죄에 머무르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산다. 죄를 진심을 반성하며 용서를 청하며 조금씩 죄를 덜 짓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용서의 언덕에 올랐던 날은 무척 맑았다. 그날 쨍한 햇살에 타버린 손등은 아직도 팔에 비해 거뭇거뭇하다. 용서가 그날의 날씨와 언덕처럼 푸르고 맑고 쉬운 일이라면 좋겠다. 멀리서는 어려워 보여서 두려웠지만 막상 올라보니 어느새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어느 날 돌아보면 마음속에 미움 대신 평화가 함께 있기를 기도하며 기대해본다.



용서는 제가 쓰기에는 너무 큰 주제라 쓰기 전 무척 망설였습니다. 막연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적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저도 다시금 깨달아 갑니다.


저는 지금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습니다. 창가 쪽에 앉아 있는 덕에 맑은 햇살이 무릎 위 손등에 쏟아지네요. 아직 순례길에서 탄 손등이 그대로인데 더 타면 어쩌나 재킷 속에 손등을 숨기다 용서의 언덕을 오르던 날의 햇살이 떠올라 두 엄지손가락으로 열심히 끄적여 봤습니다.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비행기 안 맑은 하늘 (c)이루나


이렇게 햇살이 좋은 날이면 제 질척이는 마음을 펼쳐서 싹 말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진짜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디 마음이 맑은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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