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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Apr 29. 2022

우리가 걸어야 했던 이유

각자는 각자의 이유로 순례길로 갔다. 그곳에서는 얼떨결에 와본 사람은 있었을지언정 아무 이유 없이 간 이는 없었다.


다른 이의 삶을 특별히 궁금해하거나 물어보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유독 서로 순례하는 이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하물며 산티아고에 도착해 순례 확인증을 받을 때도 순례의 이유를 밝혔어야 했으니 말이다.


직장을 그만둔 김에 오랜 꿈이었던 순례길에 오른 이도 만났고, 60세를 앞두고 새로운 부임지로 떠나기 전 개인의 삶과 업무를 돌아보기 위해 온 이도 만났다. 대학생 때부터 오고 싶었지만 그때는 돈이 없어 못 왔다가 직장인이 된 후 번아웃이 와서야 오게 된 친구도 있었다. 첫 까미노 이후 도보여행의 매력에 빠져 벌써 세 번째 길을 걷는 사람, 공무원 시험에 합격 후 첫 발령 전 시간이 남아 와본 사람(산티아고에서 만나 우리에게 자축 와인도 쐈다), 기왕 여행할 거 여름 전 다이어트도 되지 않을까 해서 온 친구(걷는 만큼 많이 먹어 실패했다고 한다...), 심지어 점성술에서 이 시기 산티아고 쪽으로 가면 운명의 짝을 만날 수 있다 해서 온 사람과 이슬람교 묵주를 늘 목에 걸고 다니던 무슬림 순례자까지 만났다.


각자는 각자의 삶을 지고 순례길에 왔다 (c)이루나


그 시작은 사도 야고보의 무덤으로 향하는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길이었지만 이제는 많은 순례자들이 각자의 이유로 이 길에 선다. 그중에는 잠깐 만났을 뿐이지만 유난히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다.


J는 아직 이십 대인 덴마크 청년이었다. 풍성하고 엷은 웨이브가 진 금발 머리카락에 밝은 푸른색의 눈과 가는 얼굴선을 가졌다. 190에 가까워 보이는 키와 호리호리한 체형 덕인지 쉬이 걷는 듯 보여도 누구보다 빨리 걸었다.


비록 독일 친구들이 이미 전날에도 그는 우리와 같은 숙소에 있었다고 정정해주긴 했지만 그를 확실히 처음 본 건 뜨리아까스텔라 마을의 알베르게였다. 오후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알베르게의 2층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책을 읽으며 쉬고 있었다. 햇살이 쏟아지던 창가 옆에 있었기 때문인지 그 모습이 유난히 동화 같이 예뻤다.


그는 우리를 보고도 별다른 인사를 안 했는데 때로는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 하는 순례자들도 있었기에 다들 그냥 그러려니 했다. 다만 어쩌다 보니 그날 그 숙소에 모인 순례자들이 모두 구면으로 다 같이 맥주와 저녁거리를 사 와 먹게 되는 바람에 그 친구만 쏙 빼놓기가 민망해 내가 나서서 혹시 같이 저녁을 먹을 거냐고 묻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날 저녁을 먹으며 그 친구의 순례 이야기도 잠시 듣게 되었다. 로스쿨에 재학 중이던 그는 법 공부가 너무 적성에 안 맞고 지겨워서 때려치운 후 바로 순례길로 왔다고 했다. 그럼 어떤 걸 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철학 공부를 할 거라 대답했다.


이 시대에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로스쿨을 그만두었다는 그가 어쩔 수 없이 신기해 보였다. 그건 유난히 그가 아주 잘 자란 모범생 같아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그의 근사한 외모가 비싼 수트를 입고 법정에 서있는 모습과 너무 잘 어울릴 거 같아서였을까. 어쨌든 나의 세속적 안타까움과는 달리 그는 오랜 고민 후 결정한 듯 견고하고 덤덤해 보였다.


그 후 길을 걷다 그를 두어 번 더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최종 도착지인 산티아고에서였다. 순례 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우리에게 축하주를 쏜다던 스페인 친구를 비롯해 여러 국적의 순례자들과 야외테이블에서 와인과 타파스를 먹고 있을 때 그가 홀로 성큼성큼 지나갔다. 우리는 그에게 아는 체를 했고 먼저 다가오진 않았어도 초대에는 늘 응했던 그답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저녁식사 후 순례 완주의 기쁨에 취한 친구들은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붙잡고 좋은 펍이 어딨냐 물었고 우리는 어느새 우르르 그곳으로 몰려가 또 술잔을 하나씩 챙겨 들었다.


난 벨기에 친구가 사준 진토닉인지 아니면 그 보답으로 내가 샀던 두 번째 진토닉인지 아무튼 진토닉 한잔을 들고, 신난 친구들을 뒤로한 채 구석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곳엔 둘이 먼저 앉아 있었는데 덴마크인 J와 독일인 D였다. D는 엔지니어였지만 역시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친구여서 우리는 잠시 그들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깊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마 진토닉 때문이었겠지. 나는 굳이 덴마크 친구에게 말했다. 난 네가 로스쿨을 그만두고 철학을 공부한다는 게 좀 신기하지만, 하고 싶은 걸 알고 그 길로 가는 네가 좀 멋지다고. 그래서 그날 너 이야기를 듣고 그 뒤로 종종 걸으며 네 생각이 났었다고. 또 만약 언젠가 그러니까 한 20년쯤 후에 J라는 이름을 가진 금발의 덴마크 철학자 소식을 듣게 된다면 난 너라고 생각하겠노라고. 내 술주정 같은 소리에 그가 꿈같은 미소로 잔잔히 웃었다.


각자는 각자의 이유로 그 길로 갔다. 그리고 서로의 이유는 서로에게 걸을 희망과 힘을 주기도 했다. 내가 그 길에서 만난 이들은 다만 삶을 더 사랑해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었다.



부다페스트로 가는 비행기에서 지난 글을 쓰고 마드리드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번 글을 썼습니다. 유럽 내 하늘길을 이동하다 보면 유난히 스페인 도착 편 손님들이 착륙 후 박수를 치고 좋아합니다. 이번에도 신난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함께 마드리드에 도착했네요. 아마도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여행지라 그렇겠지요. 여행객들의 설렘이 제게도 전해지는 듯, 일상의 순례길도 사랑해보자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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