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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May 23. 2022

간직하고픈 그것, 첫 마음

그건 반짝반짝 빛이 나거든

하느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난 뒤부터 종종 삶 속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예전의 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은 그저 우연으로 치부할 일들이다. 자주 뵙는 신부님이 기도와 신앙은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나는 그 관계 안에서 그분이 내게 알려주시고자 하는 뜻을 그저 조금이라도 눈치챌 수 있기를 바라는 중이다.




익숙한 새 시작을 앞둔 주말, 시내의 자주 가는 일식당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그 뒤 계획은 특별히 없었는데 원래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우리이기에 평소라면 아마 새로운 카페를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밥을 다 먹어갈 즈음 문득 성당이 가고 싶어 졌고 처음 산티아고 성당을 가려던 생각을 바꿔 마드리드 대성당, 그러니까 주교좌성당을 가게 되었다. 그렇게 잠깐 기도만 드리고 나와야지 생각하며 오후 5시가 채 못 된 시간에 들어간 우리가 결국 성당 밖을 나온 건 해가 지고 있던 밤 9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성당에 머물게 된 까닭은 이렇다. 도착한 성당 입구가 분주하고 유독 많은 신부님들이 보여 무슨 행사가 있나 하고 "마드리드 대성당, 5월 22일, 이벤트"와 같은 키워드로 뉴스를 검색하니, 놀랍게도 당일 오후 6시에 마드리드대교구의 사제서품식이 있는 것이었다. 한국의 다큐나 방송에도 여러 번 나와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익숙할 법한 그 장면, 바로 장엄한 <모든 성인 호칭 기도> 곡과 함께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려는 신학생들이 바닥에 엎드려 부복 기도를 올리고 사제로 다시 태어나는 자리이다. 검색한 기사에서 이번에 마드리드대교구에서 탄생하는 새 사제는 모두 11명이라고 했다.


마드리드대교구의 사제서품식 모습 (c)이루나


방송에서만 보던 그 서품식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기쁘기도 했지만 우연히 왔을 뿐인데 마치 일부러 날짜와 시간을 맞춰 온 것처럼 이렇게 딱 적당한 때 도착했다니 놀랍기도 했다. 게다가 1시간 이상 여유롭게 도착한 덕에 중간의 좌석에 편히 앉아 서품식을 보게 되었다.


기다린 시간까지 합쳐 4시간 가까이 되었던 서품식과 미사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당연히 이렇게 가까이 새 사제를 본 적은 처음이고 스페인에서 그렇게 젊은(?) 사제들을 본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들을 본 소감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말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설렘과 다짐, 걱정과 기대를 모두 품은 채 무엇보다 행복함과 충만함이 가득했던 그 한 분 한 분의 얼굴은 너무 아름다워서 많은 이들 가운데서도 단번에 누가 새 사제인지 알아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일요일 늦은 밤, 침대에 누워 들지 않는 잠을 불안해하며 이렇게 주말의 일을 복기하다 보니 나 역시 새시작을 앞두고 있어 쉬이 잠을 못 이루는가 보다 생각이 든다. 익숙한 새 시작, 떠나 있었어도 늘 나의 정체성 중 한 곳에 머물렀던 그것. 나는 다시 직장인이 되려 하고 있다. 여러 번 떠나왔던 길이라 다시 내가 잘할 수 있을지, 또 끈기 있게 해낼지 자신이 없어 멀리 있는 가족들에게도 마지못해 툭 던지듯 근황을 전했더랬다.


한편으론 대강 잘하고 싶다.

사실 하기 싫다고 생각했던 일을 붙잡게 된 것도 하느님의 응답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순례길 위에서 연락을 받았고 오랜 날 고민하며 말씀을 찾던 내게 늘 돌아온 답은 할 수 있는 일 안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한 신부님이 하기 싫은 일은 오히려 일부러 더 열심히 한다고 했던 글도 읽었다. 그런 일들에서 더 큰 뜻을 만났던 경험에서 한 말이었다. 다시 새로운 시작을 앞둔 나는 잘하고 싶다. 아주 간절히 말고 무심하게, 그래서 빨리 닳아버리지 않는 마음을 간직하며 잘하고 싶다. 그러니 대강 잘하고 싶다는 말이다.


힘들 때면 기도한다고 했다. 힘드니 투정 부리겠다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또 말씀을 들려 달라는 기도를 하겠다 했다. 벌써부터 하기 싫은 마음과 부족한 것들이 눈에 들어와 울컥울컥 마음을 헝클어 놓으려고 하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하자는 다짐을 몰래 떠올려 본다.


우연히 간 걸음 끝,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빛나던 새 사제들을  보았다. 가장 어려운 게 그거 같다. 그 빛을 간직하는 것. 아마 그건 첫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처음보다는 좀 약해지더라도 은은히 그것을 품고 사는 일, 나도 늘 그런 빛을 간직하는 사람이 되도록 청하며 일요일 밤을 닫는다. 내일의 문은 출근길로 향한다.


서품식과 미사가 끝나고 왕궁이 보이는 중앙문으로 나가는 길 (c)이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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