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다리에 온전히 힘을 주고 서 있지 못하는 아기들은 본능적으로 안겨 있는 이의 목덜미와 옷가지를 움켜쥔다. 받치고 있는 손에 힘을 살짝 풀면 더욱 꽉 움켜쥐는 작은 주먹에 웃음이 나고 귀엽긴 해도 그건 그저 생존 본능이라 감동스럽진 않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란 아이는 다르다. 상대를 가리기 시작하고 두 팔을 활짝 벌려 이리 오렴 간절히 외쳐보아도 익숙한 이 뒤로 숨고 마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니 올해 9살이 된 조카가 내게 달려와 품에 폭 안길 때면 감동을 넘어서 황송함 마저 생긴다.
그저 나를 붙잡고 서 있는 게 아니라 분명 힘주어 낮은 키의 몸을 내게 기대어 온다. 나를 힘껏 안고 몸에 비해 유난히 통통한 손바닥을 가진 손을 내게 뻗는다. 저항 없는 작은 몸을 뒤에서 들어 올려 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으면 간혹 내 몸이 폭신한 소파라도 되는 양 아주 편하게 힘을 푼다. 나는 그런 아이의 몸을 뒤에서 받쳐 안고 머리카락을 하염없이 만지다가 그 자그마한 체구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너무 따뜻해 문득 꿈결인 양 꽉 끌어안아 본다.
나는 이 아이가 나를 이토록 좋아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지 못해 더욱 어쩔 줄 모르겠다. 그동안 주고받았던 모든 사랑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가 내게 주는 사랑은 이유를 모르겠다. 피가 섞인 것도 아니고 한 계절에 한두 번씩 보면 많이 보는 편인 나를 어쩌면 이토록 사랑해 주는 것일까. 하긴 나도 이 아이에게 향하는 사랑의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아이는 귀엽고 예쁘고 또 작으니까 객관적으로도 사랑스러운 이유가 넘쳐나지만 이 아이에게 나는 무엇이기에 이토록 나를 사랑하는 걸까.
아이를 원 없이 안고 있다 온 날, 새벽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떠도 감아도 어두운 방 안에서 기억의 감각만으로 아이가 내게 안길 때 전해지던 몸의 무게를 생각하다가 내가 이 아이가 마음껏 사랑하고 기댈 만큼 더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만 이 이유 없는 사랑이 조금이나마 정당해질 듯하여 그렇다. 아이의 포옹만으로도 이렇게 온 마음으로 내가 더 나은 사람이지 못한 게 아쉬운 것이라면, 만약 내가 엄마였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좋은 사람일 수 있었을까. 어미와 그렇지 않은 사람 간 비교가 아닌 나 홀로 두고 보았을 때 엄마라 불리는 나는 그렇지 않은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었을지를 자문해보는 것이다. 그러다 불현듯 그 단어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낯설어 차마 두 번은 가정해보지 못한 채 떨쳐낸다.
내일은 조카아이를 다시 본다. 또 나를 빤히 보며 아직 반 밖에 자라지 않은 앞니를 드러내며 웃을 것이고 금발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몸의 무게를 내게 던질 것이다. 이번에는 그 무게에 휘청거리지 않고 우뚝 서서 아이의 포옹을 받아낼 것이고 덕분에 마음이 조금 더 무겁고 조금 더 넓어졌다고 작게 되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