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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Dec 20. 2021

인도에서 타지마할 안 간 사람이 있다?

- 이 글은 폴란드 여행기입니다 -

두 달이나 인도 여행을 하면서 타지마할을 안 가고 파리 가서 베르사유 안 가고 폴란드에 두 번이나 왔으면서 소금 광산과 아우슈비츠 안 간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 글은 1인칭 주인공의 자기 고백적 시점이다.


아직 폴란드에 머물 날이 며칠 더 남았으므로 가려면 당장 내일이라도 소금 광산과 아우슈비츠를 갈 수도 있겠지만 그 두 곳을 지척에 둔 도시 크라쿠프까지 가서도 안 갔으므로 이번에도 안 갈 확률이 거의 100%이다. 아니 이미 안 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누군가 이 글을 보고 이번에 소금 광산과 아우슈비츠를 가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며 목에 칼을 들이밀지 않는 이상 아마 갈 일은 없을 것이다.

 

크라쿠프 바벨성의 낮과 중앙 광장의 밤 ⓒ 2021.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원래 인생도 여행도 뭐든 도장깨기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아서 남들 다 가는 곳 안 가고, 남들 다 먹어본 거 못 먹어봤다 해서 딱히 아쉬워해 본 적은 없다. 그렇다고 절대 저 두 곳을 가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꼭 가고 싶어서 이번에는 안 가기로 한 편에 가깝다.


이런 괴상한 고집은 파리 여행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십 대 초반에 홀로 파리 여행을 할 때 뭘 봐도 너무 외롭고 쓸쓸해서 그 도시의 아름다움을 전혀 즐기지 못했었다. 그때 어떤 지인이 자기 소원은 샹젤리제 거리를 걷는 것이었다며 그곳에 갈 수 있는 내가 너무 부럽다는 말을 듣고 다음 날 샹젤리제 거리를 갔던 적이 있다. 타인의 욕망을 쫓아 간 그곳에 섰을 때 '그 사람이 그렇게 오고 싶었다던 길에 내가 서있는 거야'라는 생각에 잠시 들뜨기도 했지만 이내 수그러들었다. 그건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정말 베르사유는 가려고 했었고 꽤 가고 싶었다. 분명 베르사유를 가기 위해 열차도 탔지만 갈아타는 역에서 실수로 다른 열차를 타버리는 바람에 베르사유 대신 무서운 분위기의 외곽 동네로 가버렸다. 빈 열차에서 무섭게 생긴 남자가 굳이 내 옆자리에 앉는 순간 벌떡 일어나 기찻길을 가로질러 바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 버렸다. 다음 날은 파리를 떠나는 날이었기 때문에 베르사유를 가는 기회를 그렇게 놓쳐버렸었다.


붉은 벽돌 마을로 알려진 폴란드의 한 도시 ⓒ 2021.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유럽여행을 또 하는 게, 그것도 이미 여행한 도시를 다시 가는 게 쉬운 일일까. 그래서 그땐 영영 베르사유는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꼭 10년 정도 뒤에 베르사유를 결국 갔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말이다. 내게 파리는 너무 외롭고 힘들었던 기억의 도시였기 때문에 두 번째 파리 여행에선 모든 게 즐거웠다. 한걸음 한걸음 그 거리가 어디든 신이 났고 들떴고 무얼 먹어도 맛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베르사유에 갔을 때는 그 옛날 베르사유를 못 갔던 게 감사할 정도로 좋았다. 이렇게 더 좋은 날 좋은 사람과 오려고 그땐 못 갔던 거구나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원체 여행 계획 세우는 걸 귀찮아하는 내게 파리 여행의 경험은 '아 거기? 이번에 안 가도 돼' 하는 합리화 구실을 제대로 만들어 주었다. 별로 감흥도 없었던 샹젤리제 거리에서 서서 남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을 고, 보고 싶어 하는 걸 봤던 나보다 두 번째 여행에서야 비로소 베르사유에 갔던 내가 훨씬 더 행복했으니 말이다.


여행지에선 남의 집 빨래도 신기하다더니, 찬 바람을 최대한 피해 작은 창문만 따로 열어둔 환기 창문이 귀엽다 ⓒ 2021.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그래도 두 번째 온 폴란드이니 이번에는 갈까 생각하며 소금 광산 사진을 보니 참 예뻐 보였다. 안에 들어가면 샹들리에까지 온통 소금이라 한다. 그곳에서는 공기도 소금 냄새가 나고 짭짤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여기 있는 가족은 이미 여러 번 가본 터라 나 때문에 또 가자고 하기가 그렇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나중에 같이 오고 싶은 사람이 있어 다음번으로 넘기기로 했다. 아쉬움보다는 나중에 같이 왔을 때 소금 샹들리에를 보며 '나 저거 너무 보고 싶었던 거야!'라고 호들갑스럽게 외칠 생각을 하니 벌써 신난다. 두 번째 파리 여행에서 간 베르사유가 그렇게 좋았으니 세 번째 폴란드 여행에서 만날 소금 광산은 더 좋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카토비체의 밤 ⓒ 2021.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물론 폴란드에서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특히 바르샤바에서 본 피아노  독주 연주회는 정말 좋았다. 화려한 무대는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쇼팽의 피아노 곡들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인 겨울바람(Op. 25 No.11)을 듣고 나와 바르샤바의 매서운 겨울바람을 마주하니 그마저 곡을 완성하는 요소처럼 느껴졌다. 그 추위를 잠시 녹여주던 계피향이 가득한 따뜻한 레드와인도 좋았고 그 거리를 따라 걷다가 들어간 바르샤바 성당에서 쇼팽 심장이 안치되어 있는 기둥을 보는 것도 뭉클했다.

 

열명 남짓의 관객들과 함께 한 작은 연주회 ⓒ 2021.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순례지 중 하나인 쳉스트호바(Częstochowska)의 검은 성모상이 있는 성당에 간 날도 기억에 남는다. 스페인은 이제 젊은 층은 무신론자나 미사에 참여하지 않는 인구가 더 많다는 언론보도가 있을 만큼, 가톨릭 국가면서도 막상 미사에 가면 대부분 나이 드신 분들만 있는데 반해 폴란드에는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미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성당 한 벽면에 간절한 마음으로 걸어 놓은 묵주와 기적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반납한 목발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소망을 떠올리며 나도 오랜만에 성호를 그었다. 마침 울려 퍼지는 성가는 왜 또 그리 감미로운지 그걸 듣기 위해 한참 동안 서 있기도 했다.  


쳉스트호바에 도착했을 땐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어두워서 공원에 있던 예수님의 수난 조각상들이 상당히 그로테스크하고 무섭게 느껴졌었는데, 따뜻한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나오니 폴란드 겨울답지 않게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어 성모님께 살짝 감사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모든 게 그림처럼 아름답고 맛있었던 카페와 폴란드에서 가장 파란 하늘을 봤던 쳉스트호바 ⓒ 2021.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그 외에도 쉽게 접해보지 못한 폴란드 와인도 두어 병 마셔보고, 국민 간식 핫도그, 국민 요리 골롱카(족발), 피에로기(만두)를 맛보며 나름대로는 풍성히 즐기는 중이다. 그러니 이번에 소금 광산을 또 못 본다고 뭐 큰일인가 싶다.  분명히 더 좋은 순간 좋은 사람과 보게 될 텐데. 일상을 떠난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정답도 의무도 없이 온전히 나를 위해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여행도 내가 만족하니 됐다.


 폴란드 와인과 육회, 족발 요리. 육회는 노른자가 올려진 것까지 한식과 닮아 신기하다 ⓒ 2021.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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